벚나무와 국화(菊花)를 일본을 상징하는 것으로 많이 이야기 합니다.
보통 사쿠라(さくら)라고 하는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국화(國花)로 지정된 꽃은 없다고 하네요.
게다가 벚나무의 원산지는 우리나라 제주라는 사실.

집앞 단지내 도로의 벚꽃이 한창입니다.
인천에서는 나름 유명한 벚꽃거리중 하나라는 이야기기 있을정도로 벚꽃이 장관입니다.
주중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는데요.
비가 오면 꽃잎이 떨어질거라서 다음주에는 구경을 하지 못할거 같습니다.
요즘 바빠서 매일 야근이라 볼일은 더욱 힘들어지니까요.


50mm렌즈를 사용하니 한번에 다 못나와서 파노라마 만든다고 나눠서 찍었는데 보시다시피 부분부분 블랭크(Blank)네요.

그래서 어딘가에 들어있던 애기번들을 찾아서 다시 찍었습니다.
단지내 도로입니다.
50mm 단렌즈만 가지고 나가는 바람에 조금은 덜 보이는 것 같네요. 애기번들이라도 가지고 갈걸 그랬나 봅니다.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네요.


오늘은 야경을 한번 찍어봐야겠네요.

Posted by The 賢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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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다는 동기나 의도가 중요하다고 학교에서는 가르치죠.
영국의 뮤어헤드(J.H. Muirhead)라는 윤리학자는 "동기가 선하면 결과가 나빠도 상관없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양명학에서도 이를 같이 주장합니다.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이 그것인데 마음(心)에 천리(天理)가 하나이기에,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선천적으로 알고있으며, 앎과 행함이 하나(知行合一)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가짐이 선하기에 그 행함도 선하다는 것으로 요약해볼수 있습니다. 물론 맹자의 성선설을 믿어야겠지요.

저도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과실치사나 치상으로 처벌받는 것을 보면 의아해하기도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기가 선하다고 무조건 결과가 선한 것은 아니죠. 또한 동기가 나쁘다고 결과가 나쁠수도 없습니다.
이리저리 판단을 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아틀리에17의 권문성소장이 한 말입니다. 듣자마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군요.
보통 열심히 하면 잘한다고 칭찬을 하기때문이죠.
영리하고 부지런한 상사, 영리하고 게으른 상사, 미련하고 부지런한 상사, 미련하고 게으른 상사 중 최악의 상사는 누구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은 미련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최악의 상사입니다.
권문성소장의 이야기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피터 드러커가 효율과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바른 업무를 실시하는 것이 업무를 바르게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Doing the right thing is more important than doing things right.)

바른 업무를 하는 것(Doing the right thing)은 효과(Effectiveness)이고
업무를 일을 바르게 하는 것(Doing things right)은 효율(Efficiency)입니다.

최악의 상사는 미련하고 부지런한 상사이죠. 왜냐면 이 사람은 효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
'부지런하다, 열심히한다' 라는 단어도 또한 마찬가지로 효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습니다.
회사생활을하다보면 보여지기 위해 일을 해야할때가 많습니다.
건축설계의 업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업무량이 많고, 상대적으로 월급은 적습니다.
과거 제도판에서 T자와 삼각자, 홀더로 도면을 수작업으로 그리면 도면 한장에 3일정도 걸렸는데 그것도 야근을 해야만 가능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야근을 하는 것은 당연시 되었죠.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측면이다보니 손을 대고, 붙잡고 늘어질수록 퀄리티가 높아지긴 합니다.
이러한 시스템과 학교에서 배운 선한 동기론(?)이 합쳐지면 열심히, 부지런히, 주구장창 일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항상 야근을 해야하니 어차피 야근할거 천천히 일을 하게 됩니다.
즉 8시간에 해야할일을 12시간에 하게됩니다. 악순환이 벌어지죠.

저도 역시나 눈치껏 야근을 합니다. 제가 야근을 하면 제 밑의 직원들도 눈치보면 야근을 합니다.
눈치보지말고 퇴근하고 싶으면 퇴근하라고 합니다. 업무 종료시점만 가르쳐준 후 시간 관리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얘네들 야근 안해도 일을 마칠수 있나?"라고 말이죠. 왠지 열심히 하지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퀄리티가 떨어질 것 같다는 우려도 생깁니다.
그렇다면 3일 걸려야 할 업무의 양을 2일만에 해결하라고 이야기 해야겠구나는 생각이 듭니다.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일을 하라고 이야기 하지만, 스스로도 잘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요즘 들어 계속 드는 고민입니다.
아마 은퇴할 때까지 계속될수 밖에 없는 고민이겠죠.


시간은 그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그대가 두려워 피하는 일은, 후에 일이 그대를 피하게 될것이다.

Posted by The 賢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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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건축
카테고리 기술/공학 > 건축/인테리어 > 건축문화
지은이 쿠마 켄고 (디자인하우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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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건축관련 책을 읽었습니다.
"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을 작년 9월 15일(실제로는 훨씬 전에 읽었지만), "

건축의 거인들, 초대받다

"는 8월 24일, "

건축가들의 20대"

는 7월20일이니까 거의 반년만에 읽은 것 같습니다.
'건축의 거인들, 초대받다'와 '건축가들의 20대'는 에세이형식이어서 상대적으로 쉽게 읽혔으나
쿠마 켄고의 책은 조금 어려웠습니다.

모더니즘, 특히 르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취한 방법에 대하여 쓴 글에 좀 관심이 가더군요.
아르누보, 세제션, 데 스틸, 입체파, 미래파 등 20세기 초에 등장한 사조들은 정말 맘에 들었습니다.(이에 비해  해체계열은 싫어했죠.) 그러나 그 이후 등장한 모더니즘에 모든 것은 끝나버렸습니다.
르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모더니스트 였습니다. 저는 르 꼬르뷔제은 건축의 신으로 부르긴합니다(근대 건축의 5원칙은 .성경의 10계명 같은 것이죠 ^^)
르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모든 것을 다 없애고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쿠마 켄고는 시대가 바라는 건축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책의 내용중 일부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모더니즘에 대하여 - 르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건축의 상품화'를 잘 이해했다. 필로티로 건축을 띄우거나(빌라 사보와), 기단위에 올리는(바르셀로나 파빌리온) 등의 수법을 통하여 주변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상품처럼 포장했다. 일반 대중은 상품의 작동원리를 궁금해하지않고, 포장되어 예쁘다거나 작동법이 복잡하지않고 쉬운 상품에 관심이 많은 것처럼 르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형태, 공간을 언급하지않고 가로로 긴 창, 얇은 철골기둥을 돋보이게 하는 수법을 통하여  테크놀로지와 모던함을 돋보이게 하여 대중의 관심을 얻었다.
초기 모더니즘의 주제인 공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기에 평가가 애매하지만, 오브제로서의 단순 명쾌한 형태를 추구하며, 주택디자인에 기성건축가에 대한 비평성을 담음으로서 차별화를 꾀하였다. 즉, 중산층에 욕망(주택)에 편승하는 것과 기성세대의 방법과 미학에 칼을 들이대는 양면성의 확보를 통하여 20세기 건축의 헤게모니 차지한다.

◎ '이긴다'는 논리와 '진다'는 논리
과거 사람들은 이긴다는 논리로 이야기했다. 이긴다는 것은 외부의 '악'에 대해서 이기는 것인데, 악이 없어진 현재 이길수가 없다. 그래서 '진다'는 수사법으로 이야기한다.
형식은 자유로움에 지고있고, 공급자는 수요자에 지고 있다. 건축에서 진다는 것은 '자기생각만 하는 건축주에게 지다' '기묘한 형태의 부지에 어쩔수 없이 지다' '불합리한 건축법규에 지다' '공사 예산부족에 지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게된다.

◎ 모더니즘 vs. 포스트 모더니즘
로버트 벤츄리의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이 된다. 이 책에는 과거의 양식적인 건축의 사진이 많이 나오는데 모더니즘은 양식적 건축을 부정했기에 논란이 되었다.
모더니즘이 양식적 건축을 부정한 이유는 건축의 소유자가 계속바뀌기때문에 바뀜에 대해 대응하기 위하야 양식을 배제하게 된다.(겅제적인 접근)
'양식'은 개인의 취향이기때문에 모더니즘은 무개성적인 표현을 하게된다. 예컨데 변화있거나 리듬이 있는 공간이 아닌 동일한 천장높이의 균질한 공간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는 개발주체의 자의적인 욕망과는 거리를 두어야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건축양식은 '교환가능성, 탈주체성'에 알맞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고, 탈주체성을 제안하지만 개인적 욕망을 전면 부정하지 않아야 획기적인 성공을 한다.
미스가 제안한 유니버설 스페이스는 두개의 수평면(천장과 바닥)이 만드는 균질한 공간이고, 간단한 파티션이나 자유로운 가구배치를 통하여 공간을 구획하여 개성과 기능을 부여하게 된다. 이를 다시 말하면 파티션, 가구같은 사물은 욕망에 굴복해도 되지만 건축물 자체는 욕망에 굴복하면 않된다. 즉 건축물 자체는 사물, 상품이 놓일 장소라는 것이다.
유니버설 스페이스의 성공요인은  욕망을 긍정하면서도 욕망에 굴복하지않는 건축의 존재에 비밀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와서는 자본과 상품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래서 건축도 팔릴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한다.
주체로서의 자본에 대한 대응물이 무개성의 유니버셜  스페이스이고, 대상으로서의 자본에 대한 대응물은 개성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다.

◎ 입체파와 미래파
입체파는 기하학과 추상성이고, 미래파는 운동성과 역동성이 주제이다. 기하학과 무브망(Movement)의 결합은 에리히 멘델존의 아인슈타인 타워같이 표현주의로 갈수 밖에 없다.
그러나 데 스틸은 기하학적 형태의 단위를 만든후 그 틈에 무브망을 결합하였다. 그래서 '기하학과 무브망(movement)의 결합'이란 표현대신 '공간과 시간의 회화젹인 화해'라고 표현하였다.

◎ 보편 vs. 특수
요시자카 다카마사 - 내가 표현할수 없는 언어로는 말할수 없다.
보편 vs. 특수 의 논쟁은 중세의 신학논쟁에서 유래하였는데 "보편은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인간의 사고안에서만 존재하는가"로 말할수 있다. 전자는 실재로, 후자는 유명론이다.

관심있게 읽었던 것은 위에 언급한대로 모더니즘, 르 꼬르뷔제가 나온 부분 이었습니다.
그리고 '진다'는 논리로 말한다는 것에서는 솔직히 찔렸습니다. 저도 많이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게 됩니다. 또한 쿠마 켄고가 말한대로 말을 하게 됩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말이 있고, 핑계없는 무덤없다는 속담과 딱 맞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전공관련 이론도서를 읽으니 힘드네요.
앞으로는 이런 책을 더 읽어봐야하겠습니다.
Posted by The 賢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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