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쟁점> 서현 교수의 시청 앞 광장 주장 기고문
111매 무삭제 원고 전제! [2004/03/30]
2000년의 여름이었다. 나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원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구단공원 설계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었다. 10월 28일 서울시민의 날 행사에 맞춰 공원을 준공해야 하므로 작업이 서둘러 진행된다는 때였다. 나는 이 곳을 지났을 고종의 어가(御駕)를 생각하고 있었다. 원구단 공원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걸까 하고 시키지도 않은 일에 골몰한 한가한 건축가의 모습이 바로 내게 있었다.
원구단 공원은 태어났다. 1897년 정유(丁酉)년 음력 7월 19일 대한제국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는 것보다 시민의 날 개장이 더 중요한 공원이었다. 시민의 날에 맞추는데 성공은 하였으나 시민의 공원이 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지 않았다. 한가한 건축가는 틈나면 대한문 앞에 서서 아스라한 원구단 공원을 가늠하곤 했다. 원구단공원은 항상 썰렁했고 그 앞으로는 무심한 자동차들만 덧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건축가의 머릿속은 남이 시키지도 않은 일로, 오가는 자동차들만큼이나 여전히 분주했다.
기회가 왔다. 시청 앞에 광장을 만든다고, 현상공모로 계획안을 선정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반대의견이 여기저기서 비집고 나왔다. 교통문제가 앞장을 섰다. 청계천복원도 교통이 걱정인데 시청 앞을 막겠다는 건 무슨 심술이냐고 투덜거렸다. 월드컵의 열기에 편승한 인기위주의 정책이 아니냐고 정치적인 배경을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원래 광장문화가 없었다고 역사적 통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인터씨티그룹의 김형주, 박원근 씨와 공동으로 현상공모 참가신청서를 냈다. 현상공모에 참여한다는 것은 여기 광장을 만드는데 동의한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시청광장의 교통문제는 심각하다. 이곳은 기형적인 교통광장이다. 소공로와 태평로를 잇는 길로는 훌륭했다. 그러나 그 외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들은 굽이굽이 돌아 갈 길을 찾아야 했다. 꼬여있는 미로였고 엉켜있는 실타래였다. 그나마 광장의 많은 곳은 버려져 있었다. 성탄절이나 석탄일에 불 켜진 구조물 갖다놓는 데나 사용했다. 풀어야 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보행인의 통행이었다. 1926년 여기 경성부청사가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은 장안 교통의 중심점이 되었다. 지금의 소공로인 하세가와조(張谷川町)가 여기 바퀴로 이루어진 교통량을 유입하는 파이프라인이었다. 보행인은 길옆으로 밀려났다. 광복이 되면서는 지하로 밀려났다. 마주보이는 건너편으로 가려면 지하도를 몇 개 오르내려야 했다. 장애인, 외국인에게 이곳은 도시속의 극기훈련장이다.
도로를 유지하는 비용은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그 시민은 자동차를 타고 이곳을 통과하는 시민뿐이 아니다. 묵묵히 걸어 다니는 시민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 곳은 좀더 공평해져야 한다. 구석자리로 밀려있던 보행인의 정당한 몫을 찾아야 한다. 이곳 자동차 공간의 한켠을 비워 보행인에게 내주어야 한다. 어차피 못쓰는 공간도 많으면서 자동차 통행으로 봐도 기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지칭하는 말로 광장보다는 보행인공간을 선호한다.
우리에게는 광장문화가 없었다. 사실이다. 광장이 없던 때는 시청도 없었다. 아파트도 없고 자동차도 없었다.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광장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광장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공허하다. 우리가 지금 기와집에 살아야 하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걸어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고종의 황제즉위식 때도, 인산일에도 군중이 모인 곳이 대한문 앞이다. 전국노동자총궐기대회, 전국불조심경연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집회가 열린 곳이 이 공간이다. 이한열 노제도 여기서 열렸다. 거기 참여한 이들은 모두 우리였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들이었다.
도시는 시대의 야심과 상상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야심과 상상력이 물리적으로 가시화되어 쌓이면서 도시는 역사와 생명력을 동시에 얻게 된다. 서울시청 앞이 한국을 대표하는 장소라면 이곳은 한국사회의 모습을 명쾌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건축은 공간으로 구현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광장이라는 단어가 함유하는 것 이상을 담을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공간이다. 서울은 전 세계의 어디에서도 유례가 없는 상황을 현재진행형으로 항상 마련해놓고 있는 독특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모여 아이디어를 짜냈다.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보는 시행착오가 있었다. 설계는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데서 계속 방황했다.
근대적인 기관으로서 시청은 시민(citizen)과 관료(bureaucrats)를 전제로 존재한다. 근대적인 도시가 시민을 기반으로 존재한다면 시청은 관료를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근대의 민주사회는 관료라는 집단의 여과장치를 거쳐 행정을 집행하게 된다. 이러한 대의적 시민사회는 20세기의 말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도구는 인터넷이다. 이전에 시민의 목소리가 최고위의 행정 관료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쌓인 관료집단의 수직적 여과를 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분명 왜곡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이 시대의 인터넷은 맞춤법도 맞지 않게 써놓은 시민의 이야기까지 시장에게 직접 전달되는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민사회의 모습이었다. 놀랍게 그 맨 앞에 한국이 서있었다. 세상의 눈이 한국을 향해 동그래졌다. 축구장에 모이는 사람들의 복장을 통일시키고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좌우할 정도로 인터넷으로 꽁꽁 묶인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다. 중국의 그늘 아래 서 있었고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다. 단군 이래 한번도 우리는 세상의 복판에 서있던 적이 없었다. 꿈같은 소식이 가끔 전해졌다. 이애리사라는 젊은이가 탁구로 세계의 정상에 올라섰던 순간이 있었다. 정명훈이라는 젊은이가 세계최고 권위의 피아노 콩쿨에서 1등 없는 2등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획득의 사실은 신문의 1면에 톱뉴스로 실렸다.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세계무대에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들은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시청 앞 광장은 1등을 맞아들이는 도시공간이다.
20세기의 말은 이제 더 바뀌었다. 개인이 아닌 집합적인 우리가 세상의 1등이라 부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생 인터넷 보급률 99.3%, 초등학생 인터넷 보급률 88.6%. 인터넷으로 똘똘 뭉친 세대는 세상의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시민문화를 만들어왔다. “우리가 남이가?”하는 공동체의식의 갑옷을 입고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중무장한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국제적인 경쟁력이 있는 첫 세대였다. 이들은 시청 앞에 같은 색 옷을 입고 모여 바로 이곳이 이제 세상의 한 가운데임을 보여주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사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한국 사회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공동체의식.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니터가 세상의 매개체였다. 책도, 전화도, 미술관도, 도서관도, 카페도, 그리고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모니터 안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도 그 안에 있었다. 아바타가 자신을 대신했다. 설계는 당연히 그 매개체로 광장을 만드는 데서 전개되었다. 모니터가 바닥에 깔린 광장의 그림이 그려졌다.
모니터가 시민사회를 보여준다면 운영방식도 시민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했다. 당연히 시민들에게 임대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시민들은 직접, 보통, 평등, 비밀의 원칙에 의해 투표권을 행사함으로 시민사회를 유지한다. 이 광장에 놓인 모니터의 임대도 직접, 보통, 평등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임대하자고 했다. 아무리 커다란 대기업도,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의 팬클럽도, 아무리 높은 지위의 관료도 이웃의 초등학생과 마찬가지로 단 한 개의 모니터밖에는 임대할 수 없다.
그 모니터를 임대한 사람들은 자기가 올려놓고 싶은 화면을 올려놓는다. 비밀은 보장되지 않는다. 의사표명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모든 임대자는 자신이 올려놓는 화면에 공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투명함을 전제로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이 민주사회의 힘이기 때문이다.
투표장에서 모든 시민들은 모두 단 한 표를 행사한다. 투표용지 어디에 동그라미를 찍느냐는 것은 시민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집합적으로 모인 결과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의 광장도 그런 모습이다. 모니터를 운용하는 시민들은 단 한 장의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한 개의 모니터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광장전체의 색과 모습은 여러 시민들이 올린 화면의 집합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 사회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겠다고 도끼를 치켜드는 선택받은 강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정한 개인이나 세력이 그 결과를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광장은 빛으로 번안된 시민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이 광장의 이름은 <빛의 광장>이다.
우리는 축제를 원한다. 도시에 추억을 새기기를 원한다. 해마다 연말이면 명동과 종로가 들끓는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나하는 것이다.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막상 할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명동 거리에는 사랑의 추억을 남기려는 청춘남녀가 넘쳐난다. 그러나 온갖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쏟아내는 굉음의 찬송가를 듣는 일 외에는 이 거리에서 할 일이 없다. 이 도시의 젊음들은 여전히 정글과 사막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빛의 광장>은 축제를 담고자 한다. 시민들의 감수성을 담고자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연말의 마지막 마디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모니터의 화면이 하나씩 꺼져나간다. 광장은 침묵 속으로 사그러드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광장 전체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는 그 순간 광장의 모든 모니터는 한꺼번에 점등된다. <빛의 광장>은 순간 화려한 색채의 빛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그 때 보신각에서는 전통대로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이 <빛의 광장>이 축제를 담는 방법이다. 이 현장에 동참했던 젊은이들이 훗날 기쁘게 이 현장을 반추할 수 있을 때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이 때 이 광장은 <빛의 광장>을 넘어 우리의 광장이 된다.
현상공모는 경쟁이다.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광장이 너무 열려있는 듯 하다는 의견에 따라 절박하게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빛의 기둥이 첨가되었다. 모니터의 개수는 계속 문제였다. 처음 적당해 보이는 순간까지 무작위로 배열해 놓은 모니터의 수는 2,300개 정도였다. 숫자에 얽매이는 디자인에 대한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니터의 개수는 2,003개로 결정되었다. 현상설계이니 만큼 이런 숫자에 호감을 갖는 심사위원이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었다. 사실 2,000개나 2,003개나 2,005개나 다를 바가 없었다. 2,003개의 모니터가 뭘 의미한다는 투의 이야기는 우리 입으로는 어디서도 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현상설계안에 필요한 이런저런 부수적인 내용들은 더 필요했다. 대한문의 어간에 서서 원구단 쪽으로 보면 원구단의 황궁우와 원구단 공원이 강조되도록 바닥 조형물을 배치했다. 이 공간의 형성에서 갖는 소공로의 중요도를 존중해서 분수는 소공로의 축과 맞추어 배열했다. 버스정류장이 마련된 위치에는 나무를 심었다. 광장은 인위적 공간이다. 그런 만큼 나무를 심는 방법은 인간의 질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무는 격자형으로 배열되었다.
광장에서 필요한 온갖 도시시설물들은 서비스 스테이션(service station)이라는 도구 속으로 넣어 일괄 정리하는 것으로 했다. 공중전화, 벤치, 자동판매기, 안내판 등 필요한 것들은 모두 여기 끼워졌다. 서비스 스테이션 자체는 조명등이었다. 이것만도 특허감이라는 주위의 평가가 있었다. 관료의 공간인 시청사의 대척점에 서비스 스테이션을 하나 배치하고 인터넷 서버를 배치하는 것으로 했다. 이 사회를 유지하는 두 개의 무게추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였다.
2003년 1월 27일 저녁 당선 통지가 왔다. 당선안이 보도되자 극단적인 칭찬과 비판이 비벼져서 쏟아졌다. 중간은 없었다. 엽서 반 장 크기의 조감도를 보고는 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제각기 해석해서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우리는 칭찬보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바보 같은 건축가가 어디 있느냐고 비난했다. 그동안 이 계획안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의 시간을 쏟아 부은 건축가는 바보임이 틀림없었다. 자신들이 단숨에 보고 지적할 수 있는 문제도 감안을 못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비판의 내용은 예상한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2003개의 모니터는 2003년을 상징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예측한 대로였고 이런 괴상한 상징을 앞세워 설계를 한 건축가를 비난했다.
광장전체에 유리를 깐다고 생각하고 나온 비난이 가장 직설적인 것이었다. 광장에 유리를 깔아놓으면 미끄러워서 어떻게 걸어 다니느냐고 했다. 그들에게 당선자는 정신 나간 친구들이었다. 물론 광장 전체에 유리를 깔지 않는다. 모니터를 흩뿌려 놓고 그 위에 유리를 덮어 많아 보일 수도 있다. 유리가 덮이는 면적은 전체 광장면적의 3.3%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돌이나 나무판이다.
게다가 비난의 내용들은 유리는 얼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말 TV방송 쇼에서는 온갖 연예인들이 유리판 위에서 춤추고 뒹구는 걸 보여주는데도 유리를 깔아놓으면 미끄러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비가 오면 미끄럽다. 눈이 와도 미끄럽다. 건물의 로비에 물갈기방식으로 마감해놓은 돌 표면도 물이 묻으면 미끄럽다. 문제는 미끄럽지 않게 어떤 방안을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작은 조감도로 파악되지 않는 대비책은 실제로도 없는 것이라고 일단 비난을 시작했다.
모니터는 사면으로 비스듬히 보면 잘 안 보인다고도 했다. 자기 집의 모니터가 그러면 모든 제품이 다 그런 것으로 단언했다. 모니터 제조회사에서는 광시야각 기술을 적용한 모니터를 카탈로그에 올려놓고 있었다. 영문이나 러시아글자가 아니고 한글로 써놓은 그런 카탈로그였다.
낮에는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데 이런 디자인을 뭐에 쓰느냐고도 비판했다. 대낮에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건축가는 모른다는 믿음 역시 굳건했다. 우리는 모니터의 하나하나가 대낮에도 선명히 보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광장 바닥의 유리면에 비친 시청의 모습이 인상파 화가들의 붓자국처럼 색채를 갖고 드러나기를 원했다.
낮에 모니터를 켜놓아서 문제가 되면 꺼놓으면 된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스위치만 내리면 된다. 그 공터에서 인라인스케이트도 타고 벼룩시장도 열고 시장규탄 집회도 하면 된다. 이곳은 시민들에게 열린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원래 광장은 그런 곳이다. <빛의 광장>도 그런 점에서 다른 광장과 다르지 않다. 바닥에는 장애물이 없으니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데 지장이 없다. 서비스 스테이션에서는 전원이 공급되니 벼룩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겠다고 업보처럼 무거운 축전지를 들고 나타날 필요가 없다. 서비스 스테이션에서는 전시도, 광고도 가능하다. 내장된 스피커에서는 광장 가득한 입체음향도 지원된다. 서비스 스테이션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커피한잔 뽑아 마시면서 역시 서비스 스테이션에 걸터앉아서 오가는 사람구경을 해도 된다.
외국의 광장은 밤이면 죽은 공간이 된다. 초현실적 그림을 그리던 어느 화가의 그림처럼 거리의 신비와 우수가 넘치는 그런 을씨년스런 공간이 된다. 그러나 <빛의 광장>은 주위가 어둠에 묻히면 더 밝아진다. 그즈음 스위치를 올리면 된다. 그래서 이 광장에서 우리의 밤은 그들의 낮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지적은 이 디자인이 지닌 한시성이었다. 우선 모니터가 지닌 한시성이 지적되었다. 당연하다. 모니터는 소모품이다. 22세기에도 여기 모니터가 점멸하고 있어야 한다고 당선자가 주장하지는 않는다. 모니터의 수명은 5년 남짓으로 보면 된다. 당연히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입체영상 모니터가 나오면 이 모니터를 설치할 수도 있다. 물론 시의 예산으로 이를 진행할 수는 없다. 당선자는 민자유치를 제안했다.
달이 차면 기운다. 우리가 영원히 정보사회의 선두에 있다는 평가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광장의 모니터도 세월의 어딘가에서 작동을 멈출 것이다. <빛의 광장>에 깔린 모니터는 22세기의 언저리에는 당연히 침묵 속의 물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니터가 영원히 빛나는 것이 아니다. 당선자들은 영원한 1등을 자신할 만큼 무모한 민족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세상의 1등이 된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이 광장이 남는 것이다. 이 곳을 거니는 우리의 손자와 손녀들에게 남겨줄 역사의 증거물임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때 이 공간은 광장으로 구현된 박물관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측우기는 지금 기상청이 아닌 박물관에 있어야 더 어울린다. 그것의 가치는 지금도 가장 정교하게 강우량을 재는 도구라는데 있지 않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도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보다 더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처음이었고 최고였다는 자부심이다. 그 최고가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는 것이고 그 역사의 증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은 19세기 프랑스가 이룬 산업화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지금 에펠탑보다 높은 철탑을 세울 수 있는 나라는 많다. 프랑스가 지금 철강산업의 선두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에펠탑이 19세기 프랑스 산업의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애플사에서 만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그 컴퓨터가 지금 작동을 하기 때문에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놓은 도구였고 그렇게 해서 열린 세상을 들여다보는 단초이기 때문에 박물관에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단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바람처럼 그 어두운 모니터들을 박물관으로 변한 광장의 소장품으로 두고 볼 수도 있다. 후손들은 단호하게 다 쓸어버리고 새로운 작업을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판단은 다음 세대가 지닌 가치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때는 무모했던 할아버지들이 남긴 이 골칫덩이를 놓고 새로운 현상공모가 진행될 지도 모를 일이다.
고궁 주변에 첨단광장이 웬 말이냐는 반발도 있었다. 두 눈을 뜨고 그 곳에 가봐야 한다. 대한문 앞에서 한가하게 서 있던 어느 건축가처럼 실제로 가봐야 한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무엄하게 고궁 근처에서 굉음과 함께 지나는 자동차라는 기계들이다. 시청 앞 광장은 고궁이 아니고 하루에 수십만 대씩 바퀴로 굴러다니는 첨단 기계장치들에 둘러싸여 있다. 자동차가 첨단기계가 아니라면 TV도 핸드폰도 첨단제품이 아니다. 컴퓨터도 모니터도 소수의 과학엘리트들만 사용하는 신기한 기계가 아니다. 모니터스크린은 집집마다 컴퓨터에, 전화기에, 인터폰에 붙어있는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모니터가 집안에 있으면 일상이고 문밖에 있으면 첨단이라는 잣대는 기이하다. 우리는 첨단광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상의 광장을 원할 따름이고 그 광장의 구성방식이 도식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길 원할 따름이다.
시청 담당공무원들은 비관적이었다. 당선작은 집안에 들어온 흰 코끼리(white elephant)였다. 난감할 만도 했다. 바닥에 돌이나 깔아놓고 준공식 마친 후 잊어버리면 될 광장을 예상하고 있던 터였을 것이다. 당선작도 아니고 당선예정작으로 발표한 후 시간을 보내는 일도 벌어졌다.
바닥에 모니터를 깔아놓은 광장은 세계의 어디에도 없다. 어딘가에 그런 광장이 있으면 우리는 설계를 바꿨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당선작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담당공무원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당선작의 문제점이었다. 당선작은 벗어버리고 싶은 짐이었을 것이다.
“있다”와 “없다”가 겨루면 있다가 승리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인간의 역사는 “있다”의 승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대륙의 발견도, 인간의 달착륙도 모두 “있다”의 승리의 증거들이다. “있다”를 믿는 자들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고 1등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모니터가 깔린 광장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는 믿었다.
서울시는 실물테스트를 요구했다. 모니터와 컴퓨터를 몇 대 기증받아 우선 야외에 깔아보자고 했다. 모니터 기증요청 공문은 서울시에서는 써줄 수 없으니 당선자가 해결하라고 했다. 결국 당선자 명의로 모니터 제조회사에서 14대의 모니터와 컴퓨터를 기증받았다. 그러나 토목공사에 관계된 테스트 비용은 당선자가 해결할 길이 없었다. 서울시는 결국 실물테스트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당선자는 기증받은 모니터를 반납해야 했다. 모니터 제조회사에서는 당선자들이 실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의 초점은 습도와 온도였다. 모니터의 운용과 보관에 이상이 없도록 습도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답은 모니터 제조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정한 한 전공의 전문가 혼자서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었다. 기계공학전공과 전자공학 전공의 전문가 의견이 합쳐져야 했다. 답변은 명쾌했다. “있다.”
습기를 대처하는 확실한 방법은 모니터와 컴퓨터를 알루미늄의 밀폐형 패키지 안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광장전체가 침수되는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리와 패키지 사이는 고층건물의 유리창에 사용하는 개스킷을 끼우면 됐다. 고층건물의 유리에 가해지는 압력과 습기의 조건은 광장바닥보다 훨씬 거친 것이므로 큰 기술적인 어려움은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유리면의 내부 표면 결로 유리와 모니터를 밀착시켜 해결하는 것으로 일단 가닥이 잡혔다.
다음은 온도였다. 겨울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모니터 제조회사에서 제시하는 필요 온도의 데이터들은 거의 일치했다. 모니터가 이상이 생길 정도의 온도인 영하 20도로 기온인 내려간 날은 지난 30년간 서울에서 하루도 없었다. 여름의 열축적은 좀더 까다로운 문제로 생각했다. 여름날 문닫아놓은 자동차안의 열기를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직관적이고 가장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전문가들은 달랐다. 간단하게 해결책을 제시해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가능했다. 우선 LCD는 PDP와 달리 자체발열량이 크지 않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축적되는 태양열의 방류방법도 다양하게 제기됐다. 밀폐형 모니터에 오디오 앰프처럼 방열핀을 달아도 되고, 반영구적인 냉매파이프를 돌려도 된다는 것이었다. 파이프 내부의 냉매는 온도차에 따라 자체대류를 하면서 열 교환을 시킨다는 원리였다. 미량의 전기를 통하면 온도를 낮춰주는 열전소자라는 반도체도 있었다. 김치냉장고에 사용하는 것이니 신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하든지 몇 가지를 조합하든지 원하는 대로 설계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필요해서 더 찾아보면 다른 방법도 있을 거라고 했다.
유리의 긁힘도 거론되었다. 우선 지적될 내용은 유리의 강도는 철보다 높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유리로 덮인 책상 면에서 칼질을 해본 사람이면 쉽게 이해했다. 유리는 이상이 없고 오히려 칼날만 무뎌지는 것이다. 유리회사의 전문가는 오히려 모래를 지적했다. 모래의 강도는 유리보다 높은데 발에 묻어온 모래가 유리에 흠집을 낸다는 것이었다. 광장이니만큼 모래는 묻어올 것이다. 유리도 긁힐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모니터를 켜서 배경이 밝아지면 유리의 흠집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런 구도였다. 점점 더 긁힘이 많아지면 유리를 교체해야 한다. 모니터를 내구재로 보지 않는 만큼 유리를 내구재로 보지 않으면 간단한 사안이었다.
최초의 당선안에서 생각 못했던 개선안도 속속 등장했다. 우선 무선 네트워크의 등장이다. 당선작에서는 서버에서 단말 모니터까지를 모두 유선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상정을 하였다. 당선된 건축가들이 가지는 정보통신지식의 한계였다. 그러나 무선네트워크의 기술은 2,003대의 모니터를 모두 무선으로 연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엄청나게 많은 연결선들이 사라지면서 파야 하는 땅의 깊이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광장에서 커서조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유리판 하부에 광센서를 달고 이 부분을 발로 가리면 커서가 움직이는 것이다. 발로 움직이는 터치패드인 셈이다. 인터넷의 의미 그대로 양방향 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광장운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광장에서 실시간 투표도, 인터넷벼룩시장도 가능해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조합되는 새로운 이벤트가 가능해진 것이다.
기술적인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청의 담당자들도 결국 기술적인 점은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다음은 운영이었다.
현 상공모지침의 내용은 광장조성 사업비를 40억원에 맞추고 있었다. 광장에는 음악분수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제대로 된 음악분수는 2,30억 원 정도의 디자인 및 설치비를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물론 값싼 음악분수도 있다. 수도꼭지 수준의 노즐을 모아놓아 물줄기들의 수직정렬도 되지 않는 음악분수도 있다. 물줄기는 어찌되었건 배경에 음악만 틀어놓으면 음악분수가 아니냐는 것들도 있다. 이런 음악분수는 몇 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시청 앞 광장이었다. 동네 철공소에서 만드는 수준의 분수를 깔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40억원의 예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찌되었건 이것은 현상공모였다. 예산에 맞는 계획안이 필요했다. 40억원의 예산으로는 바닥에 돌을 까는 것은 가능했지만 모니터를 깔아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 모니터 연관부분은 기증을 받는 것으로 제안을 했다.
서울시청에서는 국내의 모니터 제조회사에 문의를 했다. 구입한다면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겠지만 기증을 할 의사가 없다는 답신을 두 개의 국내 모니터 제조회사로부터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접촉창구가 닫혔고 당선작이 제시한 조건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시 청내부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당선자의 아이디어는 좋으나 모니터기증이 어려우니 아이디어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대안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물음도 나왔다. 모니터를 바닥에 까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다. 정보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아이디어였으므로 대안은 만들 수 있었다. 바닥에 수많은 점조명을 설치하고 시청, 혹은 산하 행정기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그 조명을 점멸해도 되는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점멸하는 조명에 의한 광장의 밝기는 서울시의 행정에 관심이 있는 시민의 수에 비례하는 것이었다. 새로 그림을 그렸다.
9월 25일, 시청 앞 광장조성위원회의 입장은 단호했다. 당선작은 변형 없이 원안 그대로 실현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모니터 제조회사만 기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기증해도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추진위원들의 단호한 옹호는 오히려 당선자들이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다시 당선자가 해결할 문제였다. 과연 모니터는 제조업체에서만 기증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열쇠였다. 서울시청사의 이마에 매달린 시계는 시계제조회사에서만 기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모니터를 기증받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모니터를 운영하는 컴퓨터와 서버 전체가 확보되어야 한다. 전례가 없는 작업인 만큼 예산 추정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토목공사 이외에 필요한 시공예산은 60억원 내외인 것으로 좁혀졌다. 최소로 하면 53억원도 가능해보였으나 안전하게 63.3억원을 예측, 제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인건비, 프로그램개발비 등을 포함하는 7.9억 원 정도의 연간 운영경비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서울시에서는 원래의 예산대로 40억원을 투입하여 원래의 예상대로 돌 깔고 분수 만드는 토목 사업을 하면 된다. 이 괴상한 당선안에서 제시하는 모니터 관련사업은 민자유치로 진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데는 당선자들이나 서울시나 입장이 같았다. 사업비를 투입한 회사는 광장을 운용하면서 생기는 수입으로 사업비를 회수해 나가면 된다.
우리는 시민사회에 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빛의 광장>은 유지관리를 필요로 한다. 여기저기 부서진 곳을 손보고 청소도 해주어야 한다. 모두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수입이 있어야 사업이 되고 민자가 유치된다. 당선작은 처음부터 광장의 모니터를 유상 임대할 것을 제안했다.
초고속 통신망 사용료, 휴대전화 사용료 정도에 준하는 월 4만원 정도를 생각했다. 모니터의 개수가 이천 개 정도이니 임대수입은 연 10억 원 정도에 이를 것으로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 임대가 된다면. 그러나 1년에 50만원 정도라면 하나 임대해서 쓰겠다는 의견은 많았다. 특히 개인보다 팬클럽이나 동창회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전제로 한 곳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임대료로 부족한 부분은 자동판매기 수입도 얻고 서비스 스테이션에 공익광고도 유치해서 채워나갈 수 있었다. 가능한 수입을 항목별로 예측해서 제시했다.
서울시는 대기업이 나서주면 사업이 쉽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니터를 제조하는 두 회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회사는 모니터 기증의사 타진이후 대화창구가 닫혔다고 주장했다.
이 사업은 어차피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가 더 적당한 일이었다. 아니면 둘 다 가능한 회사가 적당했다. 당선자들은 투자용의가 있는 회사를 섭외하여 시청에 제시했다. 이 회사는 이익 없이 투자비만 회수할 수 있으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시청광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이미지광고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청에서는 역시 완고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재벌그룹에서 나서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평하지 않은 게임의 룰이었다.
재벌그룹의 최고 경영자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구속되는데 재벌그룹 밖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논지는 기형적이다. 세상이 다 안 된다는데 굳이 자동차사업을 시작했다가 결국 외국 회사에 팔아넘긴 것이 바로 재벌그룹이다. 하루아침에 재벌총수가 목숨을 끊고 경영권의 향배가 오락가락하는 것이 오늘 한국 재벌그룹의 모습이다. 그런 대기업만 믿어야 한다면 한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에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특정한 한두 업체만 사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2003년의 공공기관에서 내놓을 이야기로는 위험천만한 내용이었다.
게임이 공정한 룰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듯이 사업은 계약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공개적으로 사업설명회를 갖고 최적의 조건에 맞게 지원한 업체를 선정하고 계약을 체결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기준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사업을 전개해서 계약내용을 위반하면 조건에 따라 조치하면 된다. 광장운영위원회를 설치하여 광장이 공익우선원칙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감시하면 된다. 사업자가 조건을 위반하면 투자비를 포기하고 광장운영을 제3자에게 넘긴다고 하면 된다. 5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되 기존사업자에게는 우선협상권만 준다고 해도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고 공정한 사업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조건 모니터를 제조하는 대기업만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당선자는 사업자 선정방식과 선정조건, 운영방안까지 마련하여 서울시에 제출했다.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다양했다.
당선자가 섭외한 회사는 사업자로 선정되면 이행보증금을 예치하고 필요하면 사업비 전체를 공탁해 놓겠다고 했다.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매월말 회계장부를 공개할 의지도 있다고 했다. 사업자를 신문에 공고내서 공모하든 당선자에게 떠넘겨서 찾아오라고 하든 공정한 방법만 선택하라고 했다. 단, 선정되면 모니터는 대만제로 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방침이었다. 국내의 모니터 제조회사가 아무리 모니터를 싸게 공급한다고 해도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합리적이지 않는 시청의 자세에 대한 오기였다.
마냥 옥신각신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시청의 담당자들은 기술적인 문제에서 일단 가닥이 잡힌 것 같으니 우선 실시설계계약을 체결하고 작업을 진행하자고 했다. 사업자의 선정까지를 실시설계의 마무리로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없으니 지하장애물 확인하고 갈길 살펴 서둘러 가자고 했다.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 듯 했다. 12월 중순의 상황이었다.
2003년 12월 24일 오후 4시. 시청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장보좌관회의가 있었다고 했다. 5월에 진행할 하이서울페스티발에 맞춰 임시로 광장을 조성하는 걸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당선작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 사업을 보류한다고 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인사의 전화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당선작을 어떻게 할지도 이야기가 없었다. 결정이 되었으면 공문을 보내라고 요구했으나 끝내 대답은 없었다.
최종결정을 내렸다는 그 회의 자리에 당선자는 없었다. 광장조성위원회의 누구도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현상설계공모전 심사위원 중의 누군가가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회의의 내용과 진행상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선자가 그동안 시청의 실무담당자들에게 제시한 구체적인 해결 대안들은 그 자리에서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만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자리에서 당선작은 여전히 신문에서 보였던 엽서 반장만한 크기의 조감도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시청홈페이지의 토론방에 올라오는 수준의 논의가 있었던 듯하다. 여전히 비가와도 해가 떠도 모니터에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나눈 듯하다.
코끼리의 꼬리를 만진 사람이 한마디 했을지 모른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너무 허약해보이니 체중이 늘어날 때까지 동네 밖으로 쫓아 보내자고 했을 것이다. 동네 밖으로 쫓아내 놓으면 코끼리는 알아서 다른 동네로 가든지 굶어죽든지 할 것이라고. 우리는 굶겨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때가 되면 다시 불러올 생각이었다고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나중에 실제로 불러오겠다고 소문내면 어차피 동네 주민들이 냄비행정이라고 반발할 테니 못이기는 척 넘어가면 된다고.
시청 앞 광장은 <잔디광장>으로 조성한다고 한다. 1월 19일에 설계를 발주했다고 한다. 서울시 건설안전본부에서 작업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2월 13일에 시청 앞 광장조성위원회를 개최할 테니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은 회의 이틀 전인 2월 11일이었다. 건축가는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회의소집하면 즉시 참석해야 하는 존재로 알고 있는 듯 했다. 광장보다 더 중요한 신뢰의 선약이 당선자에게 있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공모전의 심사날이었고 당선자는 이날은 심사위원이었다. 근 1년 전에 예정되는 그 학생들과의 약속은 이틀 전에 던져넣듯이 통보되는 약속보다 중요했다. 그날 추진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어떤 결론이 났는지도 당선자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2월 23일에 조성위원회가 다시 열렸다. 당선자가 참석했다. 당선자들은 기술적인 문제, 운영상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다시 이야기했다. 유리샘플과 모니터 패키지 샘플도 제시했다. 서로 벽을 놓고 이야기하듯 아무 결론 없이 회의는 끝났다. 아니, 결론은 이미 나있었다. 회의 다음날 경찰청과 교통협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성대하게 광고가 시작되었다. 기다리던 <잔디광장>이 시민에게 온다고.
당선작 발표 이후 시청 앞 광장조성위원회의 입장은 줄곧 단호했다. 당선작을 원안 그대로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서 실시설계계약을 체결해서 남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빛의 광장>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월 23일의 회의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작년 하이서울페스티발도 자동차만 막아놓고 진행했는데 올해는 굳이 잔디라도 깔아야 하는 이유가 무어냐는 질문도 있었다. 하이서울페스티발은 광장의 준공이 아닌 기공의 순간으로 잡자는 의견도 있었다. 무력했다. 그리고 뚜렷했다. 이미 당선자가 아닌 제3자와 실시설계계약을 하고 기공식 직전에 열린 추진위원회에 시청에서 요구하는 것은 거수기였다. 들러리였다.
2000년 서울시민의 날에 맞춰 원구단공원을 서둘러 만들어야겠다던 악령은 아직도 이 공기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원구단공원을 만들어내야 했던 10월 28일이 너무 추우니 시민의 날을 봄으로 옮긴다고 했다. 거기 맞춰 광장도 준공하고 축제도 한다고 한다. 우리 도시는 내일은 없다고 아는 하루살이들이 일년 단위로 살면서 꾸려가는 동네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선 잔디를 깔아놓겠다고 한다. 지금 잔디를 깔아놓고 당선작은 여건이 조성되면 실행할 장기과제로 남겨놓겠다고 한다. 그 여건이 조성되는 때가 실제로 올 거라고 믿는 사람이 시청 공무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몇 번 이야기하면 날도 바뀌고 해가 저물고 어느덧 그런 계획안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시기가 올 것이다. 잔디광장을 들어내고 당선작을 실행한다고 하면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 준엄한 시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업은 추진되지 않을 것이다. 당선자들은 하염없이 여건이 조성될 그 때까지 이 계획안을 붙들고 있어도 좋을 정도로는 한가하지 않다.
<잔디광장>을 설계한 곳에서는 당선작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단 한번도 묻지 않았다. 광장의 지하에는 지하철이 지나고 잡다한 구조물이 엉켜있다. 광장을 설계하는 것은 이 지하구조물을 옮기는 작업을 포함한다. 당선작의 실현의지가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당선작의 내용을 감안한 <잔디광장>이 설계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서울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잔디광장>은 컵속에 들어있는 달걀 모양이라고 한다. 이 사회, 이 광장이 컵, 달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시청에서는 이 자랑스런 <잔디광장>의 명칭공모에 들어갔다.
당선자는 세 곳의 학회에서 이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신문에 나온 엽서만한 크기보다 더 크고 가깝게 이 계획안의 설명을 들은 이들은 거의 모두 전폭적으로 당선작을 지지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는 이도 있었다. 에펠탑을 종종 비교하기도 했다. 건립시기에는 논란거리였다는 점을 인용했다. 에펠은 그 구조물을 설계한 사람의 이름이다. 인간의 가치가 중요한 나라의 모습이다. 통일독일의 국회의사당에서는 건축가가 국회의장에게 열쇠를 넘겨주는 것이 준공식의 하이라이트였다. 한국에서는 고위공무원들이 줄서서 테이프 자르는 사진촬영의 순간이 하이라이트다.
세계의 건축가들이 프랑스 파리를 주목하던 미테랑 대통령 시절, 루브르박물관에 유리 피라밋을 만들겠다는 건축가의 계획안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지어졌다. 한국에서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질문에 대답을 우선 했어야 할 것이다. 피라밋은 이집트의 것이 아니냐고, 왕이 지내던 전통공간에 첨단유리구조물이 웬 말이냐고, 그 유리는 어떻게 닦느냐고, 유리가 깨지면 어떻게 갈아 끼우느냐고. 가장 투명한 구조물을 원하는 건축가의 의도에 맞춰 유리회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투명도가 높은 유리를 개발해냈다. 엔지니어는 유리를 끼우는 방식에서도 이전의 것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냈다. 이 괴상한 구조물의 유리를 닦기 위한 로보트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개발된 새 재료와 기술은 열심히 외국에서 팔려나가고 있다.
시청광장은 야심이다. 80년 가까이 고착화된 바퀴들의 흐름을 바꾸면서 시행하는 야심찬 계획이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자행되던 자동차와 보행자의 기형적 불평등구조를 바꾸겠다는 야심이다. 그 야심에 동의했기에 우리는 현상공모에 참여했다. 도시에 대한 사랑이 없는 야심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설계의 내용은 당연히 그 야심에 걸맞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여기 새기고자 했다. 그러나 이 현상공모가 공무원들 사진 찍는 배경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면 우리는 속았다.
도시는 상상력이다. 현재를 재단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우리가 사는 방식을 제안해나가는 상상력이 우리 도시를 만든다. 그것이 도시의 가치다. 그러기에 시대의 야심과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도시는 지리하고 잡다하고 음울하기만 하다. 정치적 야심이 도시에 대한 사랑보다 앞서는 도시는 처절한 한판 난투장일 따름이다. 인걸은 가도 산천은 남는 법. 그 승부의 뒤켠에는 찢어진 현수막과 헛되게 흘린 땀방울만 너저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또 다음 세대들의 몫이다.
우리는 당선작 <빛의 광장>이 완전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례가 없는 제안인 만큼 풀어야할 숙제는 분명 많았다. 그럼에도 현상공모의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견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심사위원들의 집합적 결론은 “당선작 없음”이 아니고 <빛의 광장>이었다. 시민을 대표한 심사위원들의 판단이었다. 시청공무원들은 이 결정을 무시했다.
당선에게 주어지는 부상이 실시설계권이다. 당선작을 실현시킨다는 약속이다. 실시설계계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동전 한 푼의 설계비도 작업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모든 작업비는 당선자들 주머니에서 나왔다. 중요하지는 않으나 현상설계의 당선자에게 관례적으로 수여되는 상장 같은 당선증도 축하패도 없었다. 더더욱 중요하지는 않으나 시장과의 기념사진 촬영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조성되는 광장은 <빛의 광장>이 아닌 <잔디광장>이다.
<빛의 광장>은 두어 달 작업하여 우연히 얻어낸 만화가 아니다. 몇 년 동안 복개된 개천의 흔적을 헤집고 다니고 무너진 성곽을 따라 돌며 고민해서 얻은 가치관의 결과물이다. 때로는 북한산에서 때로는 대한문 앞에서 이 도시를 들여다보며 생각하여 얻은 내용이 모인 것이다. 칼럼에서, 책에서 쓴 내용이 부끄럽지 않은지를 스스로 반문하며 얻은 대답이다. 누가 여기 점심값을 보태주어서 한 일들이 아니다. 내가 안고 살아가야 할 도시여서, 내가 알고 있어야 할 도시의 모습이어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작업이 생기면 그때 반드시 필요할 배경지식들이어서 열심히 돌아다닌 발걸음이 모여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 여름 원구단을 바라보던 건축가의 모습을 그 자리에서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마음속에 담겨있던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이 이제 같은 자리에서 회한과 혐오로 바뀔 것이 두렵다. 이 글은 면죄부가 되기를 원한다. 훗날 왜 <빛의 광장>이 서울 시청 앞에 있지 않느냐는 질타에 내밀 면죄부가 될 것이다.
미테랑이 대통령이던 시절 파리 시장은 자크 시락이었다. 뒤에 프랑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의 이야기를 여기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에 남겨 놓을 책임을 갖고 있다.”
글: 서현 (한양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_ 이 글은 서현 교수가 월간 신동아 2004년 4월호에 기고한 원고의 무삭제 원본입니다. <코리아라이크>는 서 교수와 인터시티그룹의 당선안이 폐기일로에 처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많은 독자님들께 작가의 생각을 전하여 그 뜻이 굽힘없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팀은 서 교수와의 최근 통화를 통해서 여러 경로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거하여 이명박 시장은 그의 재임기간 중에″빛의 광장″을 성사시켜보겠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전해왔습니다.
111매 무삭제 원고 전제! [2004/03/30]
2000년의 여름이었다. 나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원구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구단공원 설계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었다. 10월 28일 서울시민의 날 행사에 맞춰 공원을 준공해야 하므로 작업이 서둘러 진행된다는 때였다. 나는 이 곳을 지났을 고종의 어가(御駕)를 생각하고 있었다. 원구단 공원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걸까 하고 시키지도 않은 일에 골몰한 한가한 건축가의 모습이 바로 내게 있었다.
원구단 공원은 태어났다. 1897년 정유(丁酉)년 음력 7월 19일 대한제국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는 것보다 시민의 날 개장이 더 중요한 공원이었다. 시민의 날에 맞추는데 성공은 하였으나 시민의 공원이 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지 않았다. 한가한 건축가는 틈나면 대한문 앞에 서서 아스라한 원구단 공원을 가늠하곤 했다. 원구단공원은 항상 썰렁했고 그 앞으로는 무심한 자동차들만 덧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건축가의 머릿속은 남이 시키지도 않은 일로, 오가는 자동차들만큼이나 여전히 분주했다.
기회가 왔다. 시청 앞에 광장을 만든다고, 현상공모로 계획안을 선정한다는 공고가 나왔다. 반대의견이 여기저기서 비집고 나왔다. 교통문제가 앞장을 섰다. 청계천복원도 교통이 걱정인데 시청 앞을 막겠다는 건 무슨 심술이냐고 투덜거렸다. 월드컵의 열기에 편승한 인기위주의 정책이 아니냐고 정치적인 배경을 의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원래 광장문화가 없었다고 역사적 통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인터씨티그룹의 김형주, 박원근 씨와 공동으로 현상공모 참가신청서를 냈다. 현상공모에 참여한다는 것은 여기 광장을 만드는데 동의한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시청광장의 교통문제는 심각하다. 이곳은 기형적인 교통광장이다. 소공로와 태평로를 잇는 길로는 훌륭했다. 그러나 그 외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들은 굽이굽이 돌아 갈 길을 찾아야 했다. 꼬여있는 미로였고 엉켜있는 실타래였다. 그나마 광장의 많은 곳은 버려져 있었다. 성탄절이나 석탄일에 불 켜진 구조물 갖다놓는 데나 사용했다. 풀어야 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보행인의 통행이었다. 1926년 여기 경성부청사가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은 장안 교통의 중심점이 되었다. 지금의 소공로인 하세가와조(張谷川町)가 여기 바퀴로 이루어진 교통량을 유입하는 파이프라인이었다. 보행인은 길옆으로 밀려났다. 광복이 되면서는 지하로 밀려났다. 마주보이는 건너편으로 가려면 지하도를 몇 개 오르내려야 했다. 장애인, 외국인에게 이곳은 도시속의 극기훈련장이다.
도로를 유지하는 비용은 시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그 시민은 자동차를 타고 이곳을 통과하는 시민뿐이 아니다. 묵묵히 걸어 다니는 시민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 곳은 좀더 공평해져야 한다. 구석자리로 밀려있던 보행인의 정당한 몫을 찾아야 한다. 이곳 자동차 공간의 한켠을 비워 보행인에게 내주어야 한다. 어차피 못쓰는 공간도 많으면서 자동차 통행으로 봐도 기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지칭하는 말로 광장보다는 보행인공간을 선호한다.
우리에게는 광장문화가 없었다. 사실이다. 광장이 없던 때는 시청도 없었다. 아파트도 없고 자동차도 없었다.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광장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광장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은 공허하다. 우리가 지금 기와집에 살아야 하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걸어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고종의 황제즉위식 때도, 인산일에도 군중이 모인 곳이 대한문 앞이다. 전국노동자총궐기대회, 전국불조심경연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집회가 열린 곳이 이 공간이다. 이한열 노제도 여기서 열렸다. 거기 참여한 이들은 모두 우리였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들이었다.
도시는 시대의 야심과 상상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 야심과 상상력이 물리적으로 가시화되어 쌓이면서 도시는 역사와 생명력을 동시에 얻게 된다. 서울시청 앞이 한국을 대표하는 장소라면 이곳은 한국사회의 모습을 명쾌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건축은 공간으로 구현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광장이라는 단어가 함유하는 것 이상을 담을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공간이다. 서울은 전 세계의 어디에서도 유례가 없는 상황을 현재진행형으로 항상 마련해놓고 있는 독특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모여 아이디어를 짜냈다.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보는 시행착오가 있었다. 설계는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데서 계속 방황했다.
근대적인 기관으로서 시청은 시민(citizen)과 관료(bureaucrats)를 전제로 존재한다. 근대적인 도시가 시민을 기반으로 존재한다면 시청은 관료를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근대의 민주사회는 관료라는 집단의 여과장치를 거쳐 행정을 집행하게 된다. 이러한 대의적 시민사회는 20세기의 말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도구는 인터넷이다. 이전에 시민의 목소리가 최고위의 행정 관료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겹겹이 쌓인 관료집단의 수직적 여과를 통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분명 왜곡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이 시대의 인터넷은 맞춤법도 맞지 않게 써놓은 시민의 이야기까지 시장에게 직접 전달되는 시스템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민사회의 모습이었다. 놀랍게 그 맨 앞에 한국이 서있었다. 세상의 눈이 한국을 향해 동그래졌다. 축구장에 모이는 사람들의 복장을 통일시키고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좌우할 정도로 인터넷으로 꽁꽁 묶인 이상한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다. 중국의 그늘 아래 서 있었고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다. 단군 이래 한번도 우리는 세상의 복판에 서있던 적이 없었다. 꿈같은 소식이 가끔 전해졌다. 이애리사라는 젊은이가 탁구로 세계의 정상에 올라섰던 순간이 있었다. 정명훈이라는 젊은이가 세계최고 권위의 피아노 콩쿨에서 1등 없는 2등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획득의 사실은 신문의 1면에 톱뉴스로 실렸다.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세계무대에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들은 김포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시청 앞 광장은 1등을 맞아들이는 도시공간이다.
20세기의 말은 이제 더 바뀌었다. 개인이 아닌 집합적인 우리가 세상의 1등이라 부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생 인터넷 보급률 99.3%, 초등학생 인터넷 보급률 88.6%. 인터넷으로 똘똘 뭉친 세대는 세상의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시민문화를 만들어왔다. “우리가 남이가?”하는 공동체의식의 갑옷을 입고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중무장한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국제적인 경쟁력이 있는 첫 세대였다. 이들은 시청 앞에 같은 색 옷을 입고 모여 바로 이곳이 이제 세상의 한 가운데임을 보여주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사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새로운 세대가 한국 사회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공동체의식.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니터가 세상의 매개체였다. 책도, 전화도, 미술관도, 도서관도, 카페도, 그리고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모니터 안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도 그 안에 있었다. 아바타가 자신을 대신했다. 설계는 당연히 그 매개체로 광장을 만드는 데서 전개되었다. 모니터가 바닥에 깔린 광장의 그림이 그려졌다.
모니터가 시민사회를 보여준다면 운영방식도 시민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어야 했다. 당연히 시민들에게 임대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시민들은 직접, 보통, 평등, 비밀의 원칙에 의해 투표권을 행사함으로 시민사회를 유지한다. 이 광장에 놓인 모니터의 임대도 직접, 보통, 평등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임대하자고 했다. 아무리 커다란 대기업도,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의 팬클럽도, 아무리 높은 지위의 관료도 이웃의 초등학생과 마찬가지로 단 한 개의 모니터밖에는 임대할 수 없다.
그 모니터를 임대한 사람들은 자기가 올려놓고 싶은 화면을 올려놓는다. 비밀은 보장되지 않는다. 의사표명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모든 임대자는 자신이 올려놓는 화면에 공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투명함을 전제로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이 민주사회의 힘이기 때문이다.
투표장에서 모든 시민들은 모두 단 한 표를 행사한다. 투표용지 어디에 동그라미를 찍느냐는 것은 시민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집합적으로 모인 결과가 사회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의 광장도 그런 모습이다. 모니터를 운용하는 시민들은 단 한 장의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처럼 한 개의 모니터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광장전체의 색과 모습은 여러 시민들이 올린 화면의 집합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 사회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겠다고 도끼를 치켜드는 선택받은 강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정한 개인이나 세력이 그 결과를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광장은 빛으로 번안된 시민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이 광장의 이름은 <빛의 광장>이다.
우리는 축제를 원한다. 도시에 추억을 새기기를 원한다. 해마다 연말이면 명동과 종로가 들끓는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나하는 것이다. 또 다른 놀라운 점은 그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막상 할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명동 거리에는 사랑의 추억을 남기려는 청춘남녀가 넘쳐난다. 그러나 온갖 교회에서 나온 이들이 쏟아내는 굉음의 찬송가를 듣는 일 외에는 이 거리에서 할 일이 없다. 이 도시의 젊음들은 여전히 정글과 사막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빛의 광장>은 축제를 담고자 한다. 시민들의 감수성을 담고자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연말의 마지막 마디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모니터의 화면이 하나씩 꺼져나간다. 광장은 침묵 속으로 사그러드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광장 전체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인다. 그리고 새해가 시작되는 그 순간 광장의 모든 모니터는 한꺼번에 점등된다. <빛의 광장>은 순간 화려한 색채의 빛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그 때 보신각에서는 전통대로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이 <빛의 광장>이 축제를 담는 방법이다. 이 현장에 동참했던 젊은이들이 훗날 기쁘게 이 현장을 반추할 수 있을 때 이 도시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이 때 이 광장은 <빛의 광장>을 넘어 우리의 광장이 된다.
현상공모는 경쟁이다.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광장이 너무 열려있는 듯 하다는 의견에 따라 절박하게 필요하지는 않았으나 빛의 기둥이 첨가되었다. 모니터의 개수는 계속 문제였다. 처음 적당해 보이는 순간까지 무작위로 배열해 놓은 모니터의 수는 2,300개 정도였다. 숫자에 얽매이는 디자인에 대한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니터의 개수는 2,003개로 결정되었다. 현상설계이니 만큼 이런 숫자에 호감을 갖는 심사위원이 혹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있었다. 사실 2,000개나 2,003개나 2,005개나 다를 바가 없었다. 2,003개의 모니터가 뭘 의미한다는 투의 이야기는 우리 입으로는 어디서도 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현상설계안에 필요한 이런저런 부수적인 내용들은 더 필요했다. 대한문의 어간에 서서 원구단 쪽으로 보면 원구단의 황궁우와 원구단 공원이 강조되도록 바닥 조형물을 배치했다. 이 공간의 형성에서 갖는 소공로의 중요도를 존중해서 분수는 소공로의 축과 맞추어 배열했다. 버스정류장이 마련된 위치에는 나무를 심었다. 광장은 인위적 공간이다. 그런 만큼 나무를 심는 방법은 인간의 질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무는 격자형으로 배열되었다.
광장에서 필요한 온갖 도시시설물들은 서비스 스테이션(service station)이라는 도구 속으로 넣어 일괄 정리하는 것으로 했다. 공중전화, 벤치, 자동판매기, 안내판 등 필요한 것들은 모두 여기 끼워졌다. 서비스 스테이션 자체는 조명등이었다. 이것만도 특허감이라는 주위의 평가가 있었다. 관료의 공간인 시청사의 대척점에 서비스 스테이션을 하나 배치하고 인터넷 서버를 배치하는 것으로 했다. 이 사회를 유지하는 두 개의 무게추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구도였다.
2003년 1월 27일 저녁 당선 통지가 왔다. 당선안이 보도되자 극단적인 칭찬과 비판이 비벼져서 쏟아졌다. 중간은 없었다. 엽서 반 장 크기의 조감도를 보고는 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제각기 해석해서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우리는 칭찬보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바보 같은 건축가가 어디 있느냐고 비난했다. 그동안 이 계획안을 만들기 위해 몇 달의 시간을 쏟아 부은 건축가는 바보임이 틀림없었다. 자신들이 단숨에 보고 지적할 수 있는 문제도 감안을 못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비판의 내용은 예상한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연히 2003개의 모니터는 2003년을 상징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예측한 대로였고 이런 괴상한 상징을 앞세워 설계를 한 건축가를 비난했다.
광장전체에 유리를 깐다고 생각하고 나온 비난이 가장 직설적인 것이었다. 광장에 유리를 깔아놓으면 미끄러워서 어떻게 걸어 다니느냐고 했다. 그들에게 당선자는 정신 나간 친구들이었다. 물론 광장 전체에 유리를 깔지 않는다. 모니터를 흩뿌려 놓고 그 위에 유리를 덮어 많아 보일 수도 있다. 유리가 덮이는 면적은 전체 광장면적의 3.3%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돌이나 나무판이다.
게다가 비난의 내용들은 유리는 얼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말 TV방송 쇼에서는 온갖 연예인들이 유리판 위에서 춤추고 뒹구는 걸 보여주는데도 유리를 깔아놓으면 미끄러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비가 오면 미끄럽다. 눈이 와도 미끄럽다. 건물의 로비에 물갈기방식으로 마감해놓은 돌 표면도 물이 묻으면 미끄럽다. 문제는 미끄럽지 않게 어떤 방안을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작은 조감도로 파악되지 않는 대비책은 실제로도 없는 것이라고 일단 비난을 시작했다.
모니터는 사면으로 비스듬히 보면 잘 안 보인다고도 했다. 자기 집의 모니터가 그러면 모든 제품이 다 그런 것으로 단언했다. 모니터 제조회사에서는 광시야각 기술을 적용한 모니터를 카탈로그에 올려놓고 있었다. 영문이나 러시아글자가 아니고 한글로 써놓은 그런 카탈로그였다.
낮에는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데 이런 디자인을 뭐에 쓰느냐고도 비판했다. 대낮에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건축가는 모른다는 믿음 역시 굳건했다. 우리는 모니터의 하나하나가 대낮에도 선명히 보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광장 바닥의 유리면에 비친 시청의 모습이 인상파 화가들의 붓자국처럼 색채를 갖고 드러나기를 원했다.
낮에 모니터를 켜놓아서 문제가 되면 꺼놓으면 된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스위치만 내리면 된다. 그 공터에서 인라인스케이트도 타고 벼룩시장도 열고 시장규탄 집회도 하면 된다. 이곳은 시민들에게 열린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원래 광장은 그런 곳이다. <빛의 광장>도 그런 점에서 다른 광장과 다르지 않다. 바닥에는 장애물이 없으니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데 지장이 없다. 서비스 스테이션에서는 전원이 공급되니 벼룩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겠다고 업보처럼 무거운 축전지를 들고 나타날 필요가 없다. 서비스 스테이션에서는 전시도, 광고도 가능하다. 내장된 스피커에서는 광장 가득한 입체음향도 지원된다. 서비스 스테이션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커피한잔 뽑아 마시면서 역시 서비스 스테이션에 걸터앉아서 오가는 사람구경을 해도 된다.
외국의 광장은 밤이면 죽은 공간이 된다. 초현실적 그림을 그리던 어느 화가의 그림처럼 거리의 신비와 우수가 넘치는 그런 을씨년스런 공간이 된다. 그러나 <빛의 광장>은 주위가 어둠에 묻히면 더 밝아진다. 그즈음 스위치를 올리면 된다. 그래서 이 광장에서 우리의 밤은 그들의 낮보다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지적은 이 디자인이 지닌 한시성이었다. 우선 모니터가 지닌 한시성이 지적되었다. 당연하다. 모니터는 소모품이다. 22세기에도 여기 모니터가 점멸하고 있어야 한다고 당선자가 주장하지는 않는다. 모니터의 수명은 5년 남짓으로 보면 된다. 당연히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입체영상 모니터가 나오면 이 모니터를 설치할 수도 있다. 물론 시의 예산으로 이를 진행할 수는 없다. 당선자는 민자유치를 제안했다.
달이 차면 기운다. 우리가 영원히 정보사회의 선두에 있다는 평가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광장의 모니터도 세월의 어딘가에서 작동을 멈출 것이다. <빛의 광장>에 깔린 모니터는 22세기의 언저리에는 당연히 침묵 속의 물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니터가 영원히 빛나는 것이 아니다. 당선자들은 영원한 1등을 자신할 만큼 무모한 민족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세상의 1등이 된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이 광장이 남는 것이다. 이 곳을 거니는 우리의 손자와 손녀들에게 남겨줄 역사의 증거물임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때 이 공간은 광장으로 구현된 박물관이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측우기는 지금 기상청이 아닌 박물관에 있어야 더 어울린다. 그것의 가치는 지금도 가장 정교하게 강우량을 재는 도구라는데 있지 않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도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보다 더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처음이었고 최고였다는 자부심이다. 그 최고가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는 것이고 그 역사의 증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은 19세기 프랑스가 이룬 산업화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지금 에펠탑보다 높은 철탑을 세울 수 있는 나라는 많다. 프랑스가 지금 철강산업의 선두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에펠탑이 19세기 프랑스 산업의 자부심을 이야기하는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애플사에서 만든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지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그 컴퓨터가 지금 작동을 하기 때문에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놓은 도구였고 그렇게 해서 열린 세상을 들여다보는 단초이기 때문에 박물관에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단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바람처럼 그 어두운 모니터들을 박물관으로 변한 광장의 소장품으로 두고 볼 수도 있다. 후손들은 단호하게 다 쓸어버리고 새로운 작업을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판단은 다음 세대가 지닌 가치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때는 무모했던 할아버지들이 남긴 이 골칫덩이를 놓고 새로운 현상공모가 진행될 지도 모를 일이다.
고궁 주변에 첨단광장이 웬 말이냐는 반발도 있었다. 두 눈을 뜨고 그 곳에 가봐야 한다. 대한문 앞에서 한가하게 서 있던 어느 건축가처럼 실제로 가봐야 한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무엄하게 고궁 근처에서 굉음과 함께 지나는 자동차라는 기계들이다. 시청 앞 광장은 고궁이 아니고 하루에 수십만 대씩 바퀴로 굴러다니는 첨단 기계장치들에 둘러싸여 있다. 자동차가 첨단기계가 아니라면 TV도 핸드폰도 첨단제품이 아니다. 컴퓨터도 모니터도 소수의 과학엘리트들만 사용하는 신기한 기계가 아니다. 모니터스크린은 집집마다 컴퓨터에, 전화기에, 인터폰에 붙어있는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모니터가 집안에 있으면 일상이고 문밖에 있으면 첨단이라는 잣대는 기이하다. 우리는 첨단광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상의 광장을 원할 따름이고 그 광장의 구성방식이 도식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길 원할 따름이다.
시청 담당공무원들은 비관적이었다. 당선작은 집안에 들어온 흰 코끼리(white elephant)였다. 난감할 만도 했다. 바닥에 돌이나 깔아놓고 준공식 마친 후 잊어버리면 될 광장을 예상하고 있던 터였을 것이다. 당선작도 아니고 당선예정작으로 발표한 후 시간을 보내는 일도 벌어졌다.
바닥에 모니터를 깔아놓은 광장은 세계의 어디에도 없다. 어딘가에 그런 광장이 있으면 우리는 설계를 바꿨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당선작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담당공무원들에게는 바로 그것이 당선작의 문제점이었다. 당선작은 벗어버리고 싶은 짐이었을 것이다.
“있다”와 “없다”가 겨루면 있다가 승리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 인간의 역사는 “있다”의 승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대륙의 발견도, 인간의 달착륙도 모두 “있다”의 승리의 증거들이다. “있다”를 믿는 자들이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고 1등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모니터가 깔린 광장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는 믿었다.
서울시는 실물테스트를 요구했다. 모니터와 컴퓨터를 몇 대 기증받아 우선 야외에 깔아보자고 했다. 모니터 기증요청 공문은 서울시에서는 써줄 수 없으니 당선자가 해결하라고 했다. 결국 당선자 명의로 모니터 제조회사에서 14대의 모니터와 컴퓨터를 기증받았다. 그러나 토목공사에 관계된 테스트 비용은 당선자가 해결할 길이 없었다. 서울시는 결국 실물테스트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당선자는 기증받은 모니터를 반납해야 했다. 모니터 제조회사에서는 당선자들이 실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의 초점은 습도와 온도였다. 모니터의 운용과 보관에 이상이 없도록 습도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답은 모니터 제조회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정한 한 전공의 전문가 혼자서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었다. 기계공학전공과 전자공학 전공의 전문가 의견이 합쳐져야 했다. 답변은 명쾌했다. “있다.”
습기를 대처하는 확실한 방법은 모니터와 컴퓨터를 알루미늄의 밀폐형 패키지 안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광장전체가 침수되는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리와 패키지 사이는 고층건물의 유리창에 사용하는 개스킷을 끼우면 됐다. 고층건물의 유리에 가해지는 압력과 습기의 조건은 광장바닥보다 훨씬 거친 것이므로 큰 기술적인 어려움은 있다고 볼 수 없었다. 유리면의 내부 표면 결로 유리와 모니터를 밀착시켜 해결하는 것으로 일단 가닥이 잡혔다.
다음은 온도였다. 겨울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모니터 제조회사에서 제시하는 필요 온도의 데이터들은 거의 일치했다. 모니터가 이상이 생길 정도의 온도인 영하 20도로 기온인 내려간 날은 지난 30년간 서울에서 하루도 없었다. 여름의 열축적은 좀더 까다로운 문제로 생각했다. 여름날 문닫아놓은 자동차안의 열기를 누구나 경험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직관적이고 가장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전문가들은 달랐다. 간단하게 해결책을 제시해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가능했다. 우선 LCD는 PDP와 달리 자체발열량이 크지 않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축적되는 태양열의 방류방법도 다양하게 제기됐다. 밀폐형 모니터에 오디오 앰프처럼 방열핀을 달아도 되고, 반영구적인 냉매파이프를 돌려도 된다는 것이었다. 파이프 내부의 냉매는 온도차에 따라 자체대류를 하면서 열 교환을 시킨다는 원리였다. 미량의 전기를 통하면 온도를 낮춰주는 열전소자라는 반도체도 있었다. 김치냉장고에 사용하는 것이니 신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하든지 몇 가지를 조합하든지 원하는 대로 설계를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필요해서 더 찾아보면 다른 방법도 있을 거라고 했다.
유리의 긁힘도 거론되었다. 우선 지적될 내용은 유리의 강도는 철보다 높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유리로 덮인 책상 면에서 칼질을 해본 사람이면 쉽게 이해했다. 유리는 이상이 없고 오히려 칼날만 무뎌지는 것이다. 유리회사의 전문가는 오히려 모래를 지적했다. 모래의 강도는 유리보다 높은데 발에 묻어온 모래가 유리에 흠집을 낸다는 것이었다. 광장이니만큼 모래는 묻어올 것이다. 유리도 긁힐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모니터를 켜서 배경이 밝아지면 유리의 흠집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런 구도였다. 점점 더 긁힘이 많아지면 유리를 교체해야 한다. 모니터를 내구재로 보지 않는 만큼 유리를 내구재로 보지 않으면 간단한 사안이었다.
최초의 당선안에서 생각 못했던 개선안도 속속 등장했다. 우선 무선 네트워크의 등장이다. 당선작에서는 서버에서 단말 모니터까지를 모두 유선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상정을 하였다. 당선된 건축가들이 가지는 정보통신지식의 한계였다. 그러나 무선네트워크의 기술은 2,003대의 모니터를 모두 무선으로 연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엄청나게 많은 연결선들이 사라지면서 파야 하는 땅의 깊이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광장에서 커서조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유리판 하부에 광센서를 달고 이 부분을 발로 가리면 커서가 움직이는 것이다. 발로 움직이는 터치패드인 셈이다. 인터넷의 의미 그대로 양방향 소통(interactive communication)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은 광장운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광장에서 실시간 투표도, 인터넷벼룩시장도 가능해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조합되는 새로운 이벤트가 가능해진 것이다.
기술적인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청의 담당자들도 결국 기술적인 점은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다음은 운영이었다.
현 상공모지침의 내용은 광장조성 사업비를 40억원에 맞추고 있었다. 광장에는 음악분수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제대로 된 음악분수는 2,30억 원 정도의 디자인 및 설치비를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물론 값싼 음악분수도 있다. 수도꼭지 수준의 노즐을 모아놓아 물줄기들의 수직정렬도 되지 않는 음악분수도 있다. 물줄기는 어찌되었건 배경에 음악만 틀어놓으면 음악분수가 아니냐는 것들도 있다. 이런 음악분수는 몇 억 원 정도의 예산으로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시청 앞 광장이었다. 동네 철공소에서 만드는 수준의 분수를 깔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40억원의 예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찌되었건 이것은 현상공모였다. 예산에 맞는 계획안이 필요했다. 40억원의 예산으로는 바닥에 돌을 까는 것은 가능했지만 모니터를 깔아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 모니터 연관부분은 기증을 받는 것으로 제안을 했다.
서울시청에서는 국내의 모니터 제조회사에 문의를 했다. 구입한다면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겠지만 기증을 할 의사가 없다는 답신을 두 개의 국내 모니터 제조회사로부터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접촉창구가 닫혔고 당선작이 제시한 조건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시 청내부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당선자의 아이디어는 좋으나 모니터기증이 어려우니 아이디어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대안을 만들 수 있겠느냐는 물음도 나왔다. 모니터를 바닥에 까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다. 정보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아이디어였으므로 대안은 만들 수 있었다. 바닥에 수많은 점조명을 설치하고 시청, 혹은 산하 행정기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그 조명을 점멸해도 되는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점멸하는 조명에 의한 광장의 밝기는 서울시의 행정에 관심이 있는 시민의 수에 비례하는 것이었다. 새로 그림을 그렸다.
9월 25일, 시청 앞 광장조성위원회의 입장은 단호했다. 당선작은 변형 없이 원안 그대로 실현시켜야 된다는 것이었다. 모니터 제조회사만 기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기증해도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추진위원들의 단호한 옹호는 오히려 당선자들이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다시 당선자가 해결할 문제였다. 과연 모니터는 제조업체에서만 기증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열쇠였다. 서울시청사의 이마에 매달린 시계는 시계제조회사에서만 기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모니터를 기증받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모니터를 운영하는 컴퓨터와 서버 전체가 확보되어야 한다. 전례가 없는 작업인 만큼 예산 추정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토목공사 이외에 필요한 시공예산은 60억원 내외인 것으로 좁혀졌다. 최소로 하면 53억원도 가능해보였으나 안전하게 63.3억원을 예측, 제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인건비, 프로그램개발비 등을 포함하는 7.9억 원 정도의 연간 운영경비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서울시에서는 원래의 예산대로 40억원을 투입하여 원래의 예상대로 돌 깔고 분수 만드는 토목 사업을 하면 된다. 이 괴상한 당선안에서 제시하는 모니터 관련사업은 민자유치로 진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데는 당선자들이나 서울시나 입장이 같았다. 사업비를 투입한 회사는 광장을 운용하면서 생기는 수입으로 사업비를 회수해 나가면 된다.
우리는 시민사회에 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빛의 광장>은 유지관리를 필요로 한다. 여기저기 부서진 곳을 손보고 청소도 해주어야 한다. 모두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수입이 있어야 사업이 되고 민자가 유치된다. 당선작은 처음부터 광장의 모니터를 유상 임대할 것을 제안했다.
초고속 통신망 사용료, 휴대전화 사용료 정도에 준하는 월 4만원 정도를 생각했다. 모니터의 개수가 이천 개 정도이니 임대수입은 연 10억 원 정도에 이를 것으로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 임대가 된다면. 그러나 1년에 50만원 정도라면 하나 임대해서 쓰겠다는 의견은 많았다. 특히 개인보다 팬클럽이나 동창회 같은 오프라인 모임을 전제로 한 곳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임대료로 부족한 부분은 자동판매기 수입도 얻고 서비스 스테이션에 공익광고도 유치해서 채워나갈 수 있었다. 가능한 수입을 항목별로 예측해서 제시했다.
서울시는 대기업이 나서주면 사업이 쉽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니터를 제조하는 두 회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회사는 모니터 기증의사 타진이후 대화창구가 닫혔다고 주장했다.
이 사업은 어차피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고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가 더 적당한 일이었다. 아니면 둘 다 가능한 회사가 적당했다. 당선자들은 투자용의가 있는 회사를 섭외하여 시청에 제시했다. 이 회사는 이익 없이 투자비만 회수할 수 있으면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시청광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이미지광고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청에서는 역시 완고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재벌그룹에서 나서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평하지 않은 게임의 룰이었다.
재벌그룹의 최고 경영자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구속되는데 재벌그룹 밖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논지는 기형적이다. 세상이 다 안 된다는데 굳이 자동차사업을 시작했다가 결국 외국 회사에 팔아넘긴 것이 바로 재벌그룹이다. 하루아침에 재벌총수가 목숨을 끊고 경영권의 향배가 오락가락하는 것이 오늘 한국 재벌그룹의 모습이다. 그런 대기업만 믿어야 한다면 한국의 현주소는 어디쯤에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특정한 한두 업체만 사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2003년의 공공기관에서 내놓을 이야기로는 위험천만한 내용이었다.
게임이 공정한 룰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듯이 사업은 계약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공개적으로 사업설명회를 갖고 최적의 조건에 맞게 지원한 업체를 선정하고 계약을 체결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기준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사업을 전개해서 계약내용을 위반하면 조건에 따라 조치하면 된다. 광장운영위원회를 설치하여 광장이 공익우선원칙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감시하면 된다. 사업자가 조건을 위반하면 투자비를 포기하고 광장운영을 제3자에게 넘긴다고 하면 된다. 5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되 기존사업자에게는 우선협상권만 준다고 해도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고 공정한 사업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조건 모니터를 제조하는 대기업만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당선자는 사업자 선정방식과 선정조건, 운영방안까지 마련하여 서울시에 제출했다.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다양했다.
당선자가 섭외한 회사는 사업자로 선정되면 이행보증금을 예치하고 필요하면 사업비 전체를 공탁해 놓겠다고 했다.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보여주기 위해 매월말 회계장부를 공개할 의지도 있다고 했다. 사업자를 신문에 공고내서 공모하든 당선자에게 떠넘겨서 찾아오라고 하든 공정한 방법만 선택하라고 했다. 단, 선정되면 모니터는 대만제로 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방침이었다. 국내의 모니터 제조회사가 아무리 모니터를 싸게 공급한다고 해도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합리적이지 않는 시청의 자세에 대한 오기였다.
마냥 옥신각신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시청의 담당자들은 기술적인 문제에서 일단 가닥이 잡힌 것 같으니 우선 실시설계계약을 체결하고 작업을 진행하자고 했다. 사업자의 선정까지를 실시설계의 마무리로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없으니 지하장애물 확인하고 갈길 살펴 서둘러 가자고 했다.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 듯 했다. 12월 중순의 상황이었다.
2003년 12월 24일 오후 4시. 시청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장보좌관회의가 있었다고 했다. 5월에 진행할 하이서울페스티발에 맞춰 임시로 광장을 조성하는 걸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당선작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 사업을 보류한다고 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인사의 전화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당선작을 어떻게 할지도 이야기가 없었다. 결정이 되었으면 공문을 보내라고 요구했으나 끝내 대답은 없었다.
최종결정을 내렸다는 그 회의 자리에 당선자는 없었다. 광장조성위원회의 누구도 참석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현상설계공모전 심사위원 중의 누군가가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회의의 내용과 진행상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선자가 그동안 시청의 실무담당자들에게 제시한 구체적인 해결 대안들은 그 자리에서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만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자리에서 당선작은 여전히 신문에서 보였던 엽서 반장만한 크기의 조감도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시청홈페이지의 토론방에 올라오는 수준의 논의가 있었던 듯하다. 여전히 비가와도 해가 떠도 모니터에는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나눈 듯하다.
코끼리의 꼬리를 만진 사람이 한마디 했을지 모른다. 코끼리라는 동물은 너무 허약해보이니 체중이 늘어날 때까지 동네 밖으로 쫓아 보내자고 했을 것이다. 동네 밖으로 쫓아내 놓으면 코끼리는 알아서 다른 동네로 가든지 굶어죽든지 할 것이라고. 우리는 굶겨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때가 되면 다시 불러올 생각이었다고 뒤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나중에 실제로 불러오겠다고 소문내면 어차피 동네 주민들이 냄비행정이라고 반발할 테니 못이기는 척 넘어가면 된다고.
시청 앞 광장은 <잔디광장>으로 조성한다고 한다. 1월 19일에 설계를 발주했다고 한다. 서울시 건설안전본부에서 작업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2월 13일에 시청 앞 광장조성위원회를 개최할 테니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은 회의 이틀 전인 2월 11일이었다. 건축가는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회의소집하면 즉시 참석해야 하는 존재로 알고 있는 듯 했다. 광장보다 더 중요한 신뢰의 선약이 당선자에게 있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공모전의 심사날이었고 당선자는 이날은 심사위원이었다. 근 1년 전에 예정되는 그 학생들과의 약속은 이틀 전에 던져넣듯이 통보되는 약속보다 중요했다. 그날 추진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어떤 결론이 났는지도 당선자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2월 23일에 조성위원회가 다시 열렸다. 당선자가 참석했다. 당선자들은 기술적인 문제, 운영상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다시 이야기했다. 유리샘플과 모니터 패키지 샘플도 제시했다. 서로 벽을 놓고 이야기하듯 아무 결론 없이 회의는 끝났다. 아니, 결론은 이미 나있었다. 회의 다음날 경찰청과 교통협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성대하게 광고가 시작되었다. 기다리던 <잔디광장>이 시민에게 온다고.
당선작 발표 이후 시청 앞 광장조성위원회의 입장은 줄곧 단호했다. 당선작을 원안 그대로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서 실시설계계약을 체결해서 남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빛의 광장>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월 23일의 회의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작년 하이서울페스티발도 자동차만 막아놓고 진행했는데 올해는 굳이 잔디라도 깔아야 하는 이유가 무어냐는 질문도 있었다. 하이서울페스티발은 광장의 준공이 아닌 기공의 순간으로 잡자는 의견도 있었다. 무력했다. 그리고 뚜렷했다. 이미 당선자가 아닌 제3자와 실시설계계약을 하고 기공식 직전에 열린 추진위원회에 시청에서 요구하는 것은 거수기였다. 들러리였다.
2000년 서울시민의 날에 맞춰 원구단공원을 서둘러 만들어야겠다던 악령은 아직도 이 공기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원구단공원을 만들어내야 했던 10월 28일이 너무 추우니 시민의 날을 봄으로 옮긴다고 했다. 거기 맞춰 광장도 준공하고 축제도 한다고 한다. 우리 도시는 내일은 없다고 아는 하루살이들이 일년 단위로 살면서 꾸려가는 동네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선 잔디를 깔아놓겠다고 한다. 지금 잔디를 깔아놓고 당선작은 여건이 조성되면 실행할 장기과제로 남겨놓겠다고 한다. 그 여건이 조성되는 때가 실제로 올 거라고 믿는 사람이 시청 공무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몇 번 이야기하면 날도 바뀌고 해가 저물고 어느덧 그런 계획안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시기가 올 것이다. 잔디광장을 들어내고 당선작을 실행한다고 하면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 준엄한 시민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업은 추진되지 않을 것이다. 당선자들은 하염없이 여건이 조성될 그 때까지 이 계획안을 붙들고 있어도 좋을 정도로는 한가하지 않다.
<잔디광장>을 설계한 곳에서는 당선작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단 한번도 묻지 않았다. 광장의 지하에는 지하철이 지나고 잡다한 구조물이 엉켜있다. 광장을 설계하는 것은 이 지하구조물을 옮기는 작업을 포함한다. 당선작의 실현의지가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당선작의 내용을 감안한 <잔디광장>이 설계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서울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잔디광장>은 컵속에 들어있는 달걀 모양이라고 한다. 이 사회, 이 광장이 컵, 달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시청에서는 이 자랑스런 <잔디광장>의 명칭공모에 들어갔다.
당선자는 세 곳의 학회에서 이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신문에 나온 엽서만한 크기보다 더 크고 가깝게 이 계획안의 설명을 들은 이들은 거의 모두 전폭적으로 당선작을 지지했다.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는 이도 있었다. 에펠탑을 종종 비교하기도 했다. 건립시기에는 논란거리였다는 점을 인용했다. 에펠은 그 구조물을 설계한 사람의 이름이다. 인간의 가치가 중요한 나라의 모습이다. 통일독일의 국회의사당에서는 건축가가 국회의장에게 열쇠를 넘겨주는 것이 준공식의 하이라이트였다. 한국에서는 고위공무원들이 줄서서 테이프 자르는 사진촬영의 순간이 하이라이트다.
세계의 건축가들이 프랑스 파리를 주목하던 미테랑 대통령 시절, 루브르박물관에 유리 피라밋을 만들겠다는 건축가의 계획안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지어졌다. 한국에서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질문에 대답을 우선 했어야 할 것이다. 피라밋은 이집트의 것이 아니냐고, 왕이 지내던 전통공간에 첨단유리구조물이 웬 말이냐고, 그 유리는 어떻게 닦느냐고, 유리가 깨지면 어떻게 갈아 끼우느냐고. 가장 투명한 구조물을 원하는 건축가의 의도에 맞춰 유리회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투명도가 높은 유리를 개발해냈다. 엔지니어는 유리를 끼우는 방식에서도 이전의 것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냈다. 이 괴상한 구조물의 유리를 닦기 위한 로보트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개발된 새 재료와 기술은 열심히 외국에서 팔려나가고 있다.
시청광장은 야심이다. 80년 가까이 고착화된 바퀴들의 흐름을 바꾸면서 시행하는 야심찬 계획이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자행되던 자동차와 보행자의 기형적 불평등구조를 바꾸겠다는 야심이다. 그 야심에 동의했기에 우리는 현상공모에 참여했다. 도시에 대한 사랑이 없는 야심은 공허하고 위험하다. 설계의 내용은 당연히 그 야심에 걸맞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여기 새기고자 했다. 그러나 이 현상공모가 공무원들 사진 찍는 배경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면 우리는 속았다.
도시는 상상력이다. 현재를 재단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우리가 사는 방식을 제안해나가는 상상력이 우리 도시를 만든다. 그것이 도시의 가치다. 그러기에 시대의 야심과 상상력이 보이지 않는 도시는 지리하고 잡다하고 음울하기만 하다. 정치적 야심이 도시에 대한 사랑보다 앞서는 도시는 처절한 한판 난투장일 따름이다. 인걸은 가도 산천은 남는 법. 그 승부의 뒤켠에는 찢어진 현수막과 헛되게 흘린 땀방울만 너저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또 다음 세대들의 몫이다.
우리는 당선작 <빛의 광장>이 완전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례가 없는 제안인 만큼 풀어야할 숙제는 분명 많았다. 그럼에도 현상공모의 심사위원들은 우리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견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심사위원들의 집합적 결론은 “당선작 없음”이 아니고 <빛의 광장>이었다. 시민을 대표한 심사위원들의 판단이었다. 시청공무원들은 이 결정을 무시했다.
당선에게 주어지는 부상이 실시설계권이다. 당선작을 실현시킨다는 약속이다. 실시설계계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동전 한 푼의 설계비도 작업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모든 작업비는 당선자들 주머니에서 나왔다. 중요하지는 않으나 현상설계의 당선자에게 관례적으로 수여되는 상장 같은 당선증도 축하패도 없었다. 더더욱 중요하지는 않으나 시장과의 기념사진 촬영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조성되는 광장은 <빛의 광장>이 아닌 <잔디광장>이다.
<빛의 광장>은 두어 달 작업하여 우연히 얻어낸 만화가 아니다. 몇 년 동안 복개된 개천의 흔적을 헤집고 다니고 무너진 성곽을 따라 돌며 고민해서 얻은 가치관의 결과물이다. 때로는 북한산에서 때로는 대한문 앞에서 이 도시를 들여다보며 생각하여 얻은 내용이 모인 것이다. 칼럼에서, 책에서 쓴 내용이 부끄럽지 않은지를 스스로 반문하며 얻은 대답이다. 누가 여기 점심값을 보태주어서 한 일들이 아니다. 내가 안고 살아가야 할 도시여서, 내가 알고 있어야 할 도시의 모습이어서,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작업이 생기면 그때 반드시 필요할 배경지식들이어서 열심히 돌아다닌 발걸음이 모여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 여름 원구단을 바라보던 건축가의 모습을 그 자리에서 다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마음속에 담겨있던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이 이제 같은 자리에서 회한과 혐오로 바뀔 것이 두렵다. 이 글은 면죄부가 되기를 원한다. 훗날 왜 <빛의 광장>이 서울 시청 앞에 있지 않느냐는 질타에 내밀 면죄부가 될 것이다.
미테랑이 대통령이던 시절 파리 시장은 자크 시락이었다. 뒤에 프랑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의 이야기를 여기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모든 시대의 건축가들은 그 시대의 모습을 파리에 남겨 놓을 책임을 갖고 있다.”
글: 서현 (한양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_ 이 글은 서현 교수가 월간 신동아 2004년 4월호에 기고한 원고의 무삭제 원본입니다. <코리아라이크>는 서 교수와 인터시티그룹의 당선안이 폐기일로에 처해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많은 독자님들께 작가의 생각을 전하여 그 뜻이 굽힘없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팀은 서 교수와의 최근 통화를 통해서 여러 경로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거하여 이명박 시장은 그의 재임기간 중에″빛의 광장″을 성사시켜보겠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전해왔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글입니다. 서현교수의 모니터를 통한 빛의 광장이란 아이디어가 맘에 들었으나... 결국 무산되고말았죠. 이은석교수의 천년의 문도 무산되었죠. 이러다가 동대문운동장도 무산될까 두렵습니다. 혹시 "재임기간중에 빛의 광장을 성사시켜보겠다는" 이라는 게 혹시 루미에나리나 루체비스타를 말하는건 아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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