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andum for the 賢岩'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2.25 부케와 벌레
  2. 2011.02.23 I am‧‧‧‧‧‧
  3. 2010.12.07 유예(猶豫) - 15일의 휴가 그리고 2년 6개월의 군생활
- 1 -

떠나버린 친구가 있다. 저 멀리 미국으로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었다. 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무척이나 친구가 많았다.
난 그 중의 한 명일뿐이다. 물론 친해지려 노력하였고, 그와 난 서로 충고도 해주고 하였지만 난 단지 친구 중의 한 명일뿐이다.

Ironical하게도 그의 여자 친구를 좋아하였고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승리의 포용이랄까 하여간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질투를 한 적도 없었고 오히려 나에게 그녀의 비밀 내지는 성격 등을 집요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그에게서 난 그녀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럭저럭 사귀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이민을 간다는 소문을 들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아니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 건 불가항력적인 진실이었다.
그를 만나기도 기피했건만 난 그 앞에서 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결국 그 녀석은 안개꽃 속에 묻힌 채 싱겁게 떠나가 버렸다. ‘약속’이란 꽃말은 꽃처럼 차갑게 시들어 버린 채......

눈물의 의미도, 떠난 이유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가버렸다.
그를 잊지 않겠다고 한 그 순간부터 그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난 그때 무엇이었을까?

- 2 -

한 친구가 결혼을 했다. 소리소문도 없이
편지 속에 지나가듯 던져진 그녀의 결혼 소식은 날 초라하게 만들었다.

89년 5월 어느 날 난 친구의 소개로 그녀를 만났다.
그 녀석이 사귀었던 여자라면서. 그가 세례를 받던 날이었다. 아무 느낌이 없던 첫 만남이었다.
늘 그 입가에 머물던 미소와 눈가에 드리워진 웃음의 그림자가 인상적이었을 뿐이었다.
우연찮은 계기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녀는 자주 놀러 왔다. 같이 다니던 한 친구와 멀어지게되고 그 녀석과의 싸움에서 난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난 그렇게 믿고 있다.)
때마침 외롭고 힘든 싸움을 계속하던 나에게 동반자로서, 동지로서 다가와주었다. 그녀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그녀 때문에 말못할 싸움을 이기게 하였고 또한 그녀 때문에 그 녀석과는 더욱 멀어지게되고.
시간이 흘러 나와 그녀는 대학에 가고 학교 생활에 바빠 만날 기회마져 잃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떠났다. 부산으로 떠나가 버렸다.
모든 건 서울에 남긴 채. 그리고 우린 잊었다.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난 군인이었다. 입가의 미소와 눈가의 웃음의 그림자를 간직한 채 다시 만났다.
나, 다시 귀영한 후 반년이란 시간이 가버린 지금 그녀는 결혼을 했다.

· · · · · · ·

고등학교 3년간 만나 만나서 같이 어울리던 한 여자가 시집을 갔다.
그 외에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가 부케를 든 모습을 상상한다.
책가방을 둘러 맨 고등 학교 시절의 모습과 비교한다.

지금 나에게 남은 건 반지와 덩그러니 남겨진 나......
난 지금 무엇일까?

- 3 -
난 사랑이라 믿는다.
또한 삐뚤지 아니한 사랑이라 믿는다.
순수한 시절에 만든 추억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이젠 돌아갈 수 없다.
예전의 그녀가 옛 시절의 그가 될 수는 없다.
· ·
지금 이 시간 기도 해본다
행복하기를.......



―――――――――――――――――――――――――――――――――――――――――――――――――――――――――――――――――――――――――――――――――

군대에서 휴가를 갔다온뒤 쓴 글이다.(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

지금 읽어보니 동아리 날적이 같은 곳에 적어놓기에 적당한 글인듯 싶다.
'불가항력적인 진실', '꽃처럼 차갑게 시들어 버린 채......'라는 등의 낯간지러운 말들을 쓴다거나, 도치법을 사용했다거나, 말줄임표의 남발같은 것은 군대가기 전 동아리 날적이에 쓰던 글의 전형적인 글투였다.
그때는 그런 것을 쓰면 좋은 줄 알던 시절이었다.

안개꽃의 꽃말에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약속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상징한다거이나, 제대하고 한참을 지나서 결혼한 것이나(잘못된 소문을 전해준 것인것 같다.) 등을 보면 잘못된 정보를 이용해 글을 쓰기도 했다.
군에 매여있던 시절에는 세상 모든 것이 군대때문에 잘못돌아간다고 믿고 있을때였다.
이글은 민망하다 못해 쪽팔리는구나...ㅠㅠ

Posted by The 賢岩
,
“넌 왜 추운 겨울에 군대에 가려고 하니?”
“글쎄‧‧‧‧‧‧. 꼴찌가 있어야 일등이 있으니까‧‧‧‧‧‧.”
“단지 그거?”
“그래, 꼴찌가 있어야 일등이 있는 거고 겨울에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가야지. 고생도 하고.”
“야! 꼴찌보다 일등이 나은 거지 왜 하필 꼴찌가 되려고 그래?”
“그냥, 일등도 못해보았지만 꼴찌는 근처도 못 가보았어. 그래서‧‧‧‧‧‧.”

유미와의 이야기였다.
고등부 여름 수련회에서 같은 조라는 인연으로 친해진 아이. 날 많이 이해해주었던 아이이기도 했고, 군대에 올 때도 많이 걱정을 해주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김광석 다시 부르기 I“을 선물로 주며 떠나왔다.
걱정스러웠지만 그래도 그 땐 행복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간다. 낯선 이들의 모임 속에 나 역시 낯선 이방인으로 돌아간다.
조금은 두렵다.

꼴찌가 되기 위해 군대에 온 나는 철저한 꼴찌였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이고 꼴찌였다. 음악이거나 믿음이거나 운동마저도 난 꼴찌였다.
사실 나는 꼴찌가 되려고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말 그대로 꼴찌가 되었다. 그 것은 교만이었을까?
그 말을 하기 시작한 후로 난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휴학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학교에 갔을 때 부총장실 점거 롱성으로 그들과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휴학계만 제출한 채 난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이민 가 계시다 잠시 귀국하신 숙모만을 보고 난 군대로 갔다.
잠시 여행을 가듯이......

울면서 떠난 집에의 그리움이 커질 무렵, 첫 휴가 때도 난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그대로 귀대를 하고. 그후 난 꼴찌만을 고수한 채 살아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정을 하고 꼴찌의 위치를 찾아간다.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꼴찌들이 나를 보고 힘을 내고 자신을 내어 그들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 자신을 빠져 나오게 할 수는 없었다.
항상 그리워하면서 난 꼴찌의 길을 걸어갔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거나 돌아보지 아니 하였다.
사람들은 내게 항상 물어 왔다. 너는 왜 항상 힘들어 하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나도 내가 왜 힘들어하는 지를.
어쩌면 나는 꼴찌라서 힘들어 하기 보단 힘들어하기에 꼴찌를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들어하면서도 나는 피하기만 하였다.
도피처가 존재하리라고 믿으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난 도피하기만 하였다.
숨박꼭질마냥 운명과 나는 서로를 찾고 도망하기만 하였다.

동기 졸업식에 갔다. 학사모가 왠지 어색하게 보인다.
나에겐 청바지와 T셔츠의 그들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데.
그들은 이제 정장을 한다. 어울리지 않게 넥타이와 치마를 입는다. 그들은 사회의 통념 속에서 자라나고 기성인의 행동을 섣부르게 흉내내며 사회의 틀을 따라하려고한다. 몇몇은 벌써 00건축이라 인쇄된 명함을 들이민다.
이젠 나도 그들을 따라하게 된다. 나 역시 그들과 떨어질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씩은 나도 늙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동계 수련회에도 갔다. 낯선 얼굴들이다. 모두가 낯설다.
내일이면 들어간다.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보았다.
군대 가기 전과 달리 어차피 제대 후엔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결국 모두 잊혀질 거, 쓸데없이 애쓰고, 쓸데없이 상처받고, 쓸데없이 아파하고, 쓸데없이 힘들어하고, 쓸데없이 슬퍼하고,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난 이방인이다.
이제 돌아왔지만 왠지 들어갈 수 없는 유리벽이 존재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닐텐데 나만 힘들어하는 것 같다.



―――――――――――――――――――――――――――――――――――――――――――――――――――――――――――――――――――――――――――――――――
제대를 3달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가 들어가면서 썼던 글.
토씨하나 고치지않고 그대로 올린다.
다만 끝맺음을 하지않아서 글이 중간에 잘린 상태.

군대에 가고난 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제대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오히려 그들에게 내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군대를 갔다오면 정신차린다던데...어른이 된다던데...아니었나보다.
지금 읽어보니 왕 유치하구나.
Posted by The 賢岩
,
猶豫
賢岩

지금 시간 04:19:56
이제 슬슬 하루 일과가 시작하고 있을때다.
갑자기 밤이 새고싶어졌다. 원래 밤이란 시간은 감정이 지배하는 시간이니까 이렇게 글을 쓰고 잇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눈도 오고 있으니, 이제 2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Rule이니까.

대학부 예배때 군에 들어가는 14기녀석을 보았다. 괜히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난다.
내 생각이 나서일까? 아마 그럴 성 싶다. 그 녀석을 지켜보면서 나 떠날 적 생각을 해본다.
기차를 보면 무작정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한 까닭이었는지 떠나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나도 그 대열에 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가족과 나 자신의 두려움과 사랑하던 여인의 눈물. 그래도 난 떠났다.

난 어느날인가부터 연작시(連作時)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도피처(逃避處)가 없다'란 제목으로
아마도 지난 여름 방학때 군대란 문제를 생각하면서 였으리라.
난 이 시를 힘들어할때 마다 썼다. 도피처(逃避處)를 찾는 마음으로 언제나.
어차피 시 제목마냥 도피처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시를 쓸 때 만큼은 난 도피처안에서 쉼을 누리고 있었으리라.

나도 모른 채 난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찬양팀 후배의 집에 놀러 갔었다.
그 아이와 얘기하던 중 떠나기 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잊어가고 있던 이야기를...

어느새 주일과 일요일의 개념이 섞이고 주일 성수의 기도제목마저 사라져가고, CLT시절의 QT노트엔 제 1번의 기도제목도 군대였던 만큼 난 이것에 심각하고 민감해 하였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혜정이 누나가 내게 소포를 보내왔다.
소포래봤자 한 달치의 대예배, 대학부 주보, 1장의 선교신문이 고작이었지만, 난 그 소포를 제일 소중히 간직할 정도로 기뻐한다.
그 가운데 노을이의 디딤돌을 읽었다. 쓴 웃음으로
'난 지금 혼자가 되는 연습을 한다.'
난 군이란 문제 이전부터  이 연습에 골몰해 했다. 서정윤님의 홀로 서기란 문제로

난 지금 판결을 받았다. 하나님께 자숙하라는 명령이리라.
2년 6개월이란 유예기간으로...


출처 : 1995년 2월 11일 토요일 제자들(명성교회 대학부 주보)
(1994년 상병휴가를 나와서 대학부 주보에 기고한 글)


'Memorandum for the 賢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케와 벌레  (0) 2011.02.25
I am‧‧‧‧‧‧  (0) 2011.02.23
Posted by The 賢岩
,